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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바실리 성당, 굼백화점, 크레믈린 궁전 등을

돌아보면서 러시아 역사 이야기를 풀어본다.

***

(고대 러시아)
러시아 슬라브 민족이
처음 발원한 곳은
지금의 벨라루스 남부와 우크라이나 북부의
키예프 인근지역이라고 한다.

슬라브 민족이
점점 수가 늘면서
노브고로드와 블라디미르-수즈달(모스크바)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8세기까지만해도
국가라고 하기엔 미흡한 형태의
부족사회로 흩어져 살았다고 한다.
이는
이 곳의 땅들이 온통 늪 지대여서
교통과 도시건설, 지리적 통합이 쉽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이 당시의 슬라브 민족은
루스(Rus) 족이라고도 불렸는데
결국 러시아(Russia)라는 국호의 기원이 된다.

그러던 것이
880년경 북유럽의 바이킹족인
류릭(Rurik)이란 사람을
지도자로 초빙하면서
급속한 사회발전을 이룬다.
어떻게
이방인에게 부족통치를 맡기게 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암튼
이 류릭이란 사람의 계보로부터
여러 공국들이 성립되고
  러시아의 왕통이 계속 이어진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일본 왕의 계보가
우리나라 백제 왕손에서 시작된 것과도 비슷하다.

(공국 할거 시대)
우리나라에도
3국시대가 있었던 것처럼
1200년대 무렵 러시아 지역엔
키예프 지역을 중심으로 한
키예프 루스(Kievan Rus) 공국을 대공국으로 하고
블라디미르-수즈달(Vladimir Suzdal),
노브고로드(Novgorod) 등의
여러개 공국으로 분할되어
위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일부와
아래로는 흑해까지 아우르는
꽤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모스크바 공국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만큼
아주 미약한 지역이었다.

원래 모스크바는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에 속해 있던
완전 쓸모없는 늪지 땅이었는데
이 공국의 대공이 1263년 갑자기 죽자
그 동생이 권력을 차지했고
원래 후계자였던
형님의 2살짜리 아들, 즉 간난아기 조카 '다닐 1세'를
쫓아내면서 떼어준 땅이 바로 모스크바였다.

그러나
이 한미한 땅에서
러시아 통일제국의 역사는 시작된다.

(모스크바 대공국 시대)
모스크바 공국이 생겨난 당시는
이미 1236년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러시아 역사상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던 시절이었다.
러시아의 모든 공국들이
몽골 기마병에게 무릎을 꿇었으며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고
문화재는 파괴되었고
값진 물건들은 수탈당했다.

그러나
몽골의 킵차크 칸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왔던 모스크바 공국은
절묘한 외교술을 발휘하면서
은연중 힘을 키운다.
몽골 왕실에 납짝 엎드려 조공을 바치고
심지어 몽골 왕실과 정략결혼까지 하면서
몽골의 비호를 얻어 점차
다른 공국들을 지배하는 대공국의 위치에 올라선다.

다닐 1세에서 시작해
이반 1, 2세, 바실리 1, 2세를 거치면서
서서히 국력을 다진 모스크바 공국은
이반 3세 때인 1460년
몽골세력을 몰아내고 200여년만에 독립을 쟁취했으며
몽골을 피해 키예프에서 옮겨간
노브고로드 대공국과 그 휘하의 여러 공국들을 복속시켜
통일제국의 면모를 갖춘다.

한반도에서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3국 통일을 이룬 것과도 흡사하다.
다른게 있다면
통일 이후 우리는 점차 국토가 좁아지고 약해진 반면
러시아는 크게 융성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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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3세와 이반 4세 - 러시아 1차 부흥기)
이반 3세는
'Иван Великий, 이반 볠리끼'
직역하면 '위대한 이반',
우리나라에선 '이반 대제(大帝)'라 불릴만큼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공헌이 큰 인물의 하나다.
그는
영토를 계속 확장하는 한편으론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황실과 혼인을 하고
로마 정교회를 적극 후원함으로써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는다는 명분하에
당시 유럽의
봉건주의, 절대군주제를 도입하여
러시아의 경제운용과 통치이념으로 삼는다.


 
 
(동로마제국에서 따온 러시아 제국의 쌍두독수리 국장문양, 좌측 중앙: 쌍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소장 작품, 우측: 여름궁전의 첨탑, 소련시절에는 망치와 낫이 그려진 문양을 국장으로 사용했으나 1993년부터 다시 쌍두 독수리 문양으로 복귀했음)
 

다른 유럽국가보다
뒤늦게 간신히
통일국가 형태를 갖추게 된
러시아로서는
이같은 왕권신수설에 기반한 강력한 통치기반 구축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강력한 왕권 통치가 아니었다면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은, 오늘날의 러시아를 만든
그 당시의 대대적인 정벌전쟁들이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아마 민주 자유국가가 되기도 전에
세계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가능성도 크다.

아무튼
이반 대제의 대국굴기(大國屈起)는
손자인 이반 4세(1530~1584)에 이르러 활짝 꽃피게 된다.
영토를 동쪽으로
시베리아와 오오츠크해 연안까지 넓혀
모피 생산지를 확보하고 태평양으로 바닷길을 텄다.
남쪽으로는
당시 킵차크 칸국이 멸망하면서 떨어져 나온
아스트라한 칸국과 카잔 칸국 등
러시아를 계속 괴롭히는 몽골 잔존 세력들을 괴멸시키고
러시아 영토로 편입했다.

이로써
수백년간 러시아의 주적이었던
몽골은 러시아 주변에서 완전 소멸된 셈인데
이반 4세는 이를 기념하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건축하라고 지시한다.
승리에 대한 감사로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바실리 성당, 몽골족에 대한 승리를 기념해 1555년 건설하기 시작해 1561년 완공, 현재는 역사박물관 별관으로 쓰임)
 

(성 바실리 성당)
'Собор Василия Блаженого'
(사보르 바실리야 블라줴나바, 성 바실리 성당)

승리의 불꽃을 상징하는
8개의 양파 모양 탑으로 이뤄진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기 보단
동화 속의 성이나 궁전 같은,
모스크바에서
이것 하나 보면 다 보는 것과 같은,
그런 건축작품이다.

러시아의 통일과 독립을
동시에 기념하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는
성 바실리 성당과 이를 건설한
이반 4세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이반 4세
나이 3살 때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가 섭정을 했는데
삼촌들이 왕위 찬탈 모의를 벌이기도 했고
결국 섭정하던 어머니가 독살 당하는 시련을 겪게 되지만
이는 그 후 겪게 되는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권력을 잡은 귀족들은
어린 이반 4세를 폐위시키지는 않았지만
음식도 안주고 옷도 안입혀
거지처럼 살게 하면서 때로는 고문까지 하는,
지독한 아동학대를 했다고 한다.

이런 고난을 견디면서
나이 16살이 된 이반 4세는
은연중 지지세력을 모으고
절묘한 이간책을 써서 귀족들을 분열시킨 후
드디어 왕권을 잡게 된다.
그는 러시아 최초로
Царь(차르, 로마황제를 뜻하는 라틴어 '카이사르'의 러시아식 발음)
칭호를 스스로 붙이고
왕권을 강화해 나간다.
영토를 확장하고, 법전을 편찬하고,
의회제도를 도입하고 국력을 강성하게 하여
러시아의 1차 부흥기를 맞는다.

그러나
이반 4세는
어렸을 때의 정신적 상처 때문인지
인간적으로는
의심병과 편집증에 사로잡힌 광인이기도 했다.
특히
왕비였던
'아나스타샤 로마노프'가 죽자
아내가 독살됐다는 의심을 하면서
더욱 난폭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많은 귀족들을 학살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노년에는
며느리를 때려 유산시키고
항의하는 아들마저
때려 죽이는 패륜적 행태를 보인다.
폭군의 전형이다.

그래서
이반 4세를
러시아에서는
Иван Грозный (이반 그로즈늬, 공포의 이반)
서양에서는
Ivan, the Terrible'
우리나라에선
'이반 뇌제' (雷帝)라는 별명으로 부른다.

대개
세계적으로 아름답거나 웅장한 건축물들을 보면
약간 광기 있는 왕들이 만든 경우가 많다.
독일 퓌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그렇고
중국의 진시황릉이 그렇다.

이들이 만들어 놓은 건축물들이
오늘날 관광자원으로 변해
후손들에게 돈을 벌어주는걸 보면
우리나라에도 폭군이나 광적인 왕들이 꽤 있었는데
왜 그들은 세계적인 관광자원 하나
남겨놓질 않았을까.

먼 후손들로서는
폭군은 용서를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왕은 용서하기 어렵다.
이건 먼 미래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진리일 것이다.

아무튼
러시아 최고의 아름다운 건축물
성 바실리 성당은
수백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게 된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
1812년 6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한다.
60만 대군이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양국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큰 충돌없이 지내 왔으나
나폴레옹이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내리고
모든 유럽국가의 대영국 통상을 금지한 것이다.

하지만
농업국인 러시아로서는
영국에 곡물을 수출해야만 했고
프랑스는 이를 막아야 했다.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 국경을 넘었을 때는
겁을 좀 줘서 항복을 받고
얼른 본국으로 돌아가자는 심산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러시아 군대는 몇차례 접전을 한 다음부터는
계속 후퇴만 하는 것이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모스크바까지 진격했고
러시아군이
모스크바까지 비워주고 후퇴하자
모스크바에 무혈 입성한다.
이때가 9월.

더이상 추격하기도 지친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 진을 치고 한달을 지내면서
러시아가 항복하러 오기를 기다린다.

그 때
프랑스 군대는
성 바실리 성당을 마굿간으로 쓰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래도 미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들이라 그런지
성당을 파괴하진 않아서 다행이다.

9월말이 되면서
큰 화재가 나서 식량이 부족한데다
날씨도 추워지기 시작하자
나폴레옹은 소득도 없이 철수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때부터
프랑스 군대의 몰락은 시작된다.
러시아 군대가 사방에서
공격해 오고 춥고 식량은 없고,
나폴레옹 군대는 풍비박산이 난다.
간신히 10만명도 안되는 나폴레옹 군대가
본국으로 귀환한 것은
이듬해 1월.

이 전쟁 이후
신망을 잃은 나폴레옹은
결국 권좌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됐으니
성 바실리 성당을 마굿간으로 쓴
댓가 치고는 좀 가혹했다고나 해야할지.

차이코프스키는
이 당시 러시아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812년 서곡 (1812 Overture, op 49)를 작곡한다.
원래는
실제 대포를 쏴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대포소리를 낸다는 구상으로 작곡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현재는
대포소리를 녹음해서 쓰거나
큰북으로 대신한다고 한다.

 

 
Tchaikovsky - 1812 Overture (Full with Cannons)

또 이때 전투를 지휘한
러시아 군 총사령관
Михаил Кутузов (미하일 쿠투조프)는
구국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순신 장군이다.

쿠투조프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성당 앞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성당 앞의 쿠트조프 동상과 초상화)
 

쿠투조프는
전쟁에서 오른쪽 눈을 잃어서
초상화를 그릴 땐
항상 왼쪽 얼굴만 나오게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인
1813년 병으로 사망하는데
나중에
러시아 대문호인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가 발표한
역작 "전쟁과 평화"는 다름 아닌
쿠투조프와 나폴레옹간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스탈린 공산당 시절의 성당 폭파 위기)
성 바실리 성당은
1917년
볼셰비키 공산혁명이 일어나고
종교를 탄압하는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수많은 성당들을 폭파시켜 버렸던
공산주의 만행 속에서
또 한번의 위기를 맞는다.

러시아 공산당은
1930년대에 들어서
모스크바의 도시계획을 새롭게 추진하는데
성 바실리 성당이
도시건설의 걸림돌로 지목된 것이다.

성 바실리 성당을 폭파해 버리고
관공서를 지으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러시아 건축가들은
스탈린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반대했다고 한다.
스탈린은
반대하는 건축가들을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기 까지 했지만
어쩐 일인지 끝내 폭파는 하지 않았다.
아주 없애 버리기는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었던게 틀림없다.

(이반 4세 죽음 이후의 혼란과 류릭 왕조의 종말)
이야기가 옆으로 많이 샜는데
다시 이반 4세 시대로 돌아 오면
그는
러시아를 위해 많은 일을 했지만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발트해 전쟁에서는 계속 패배한다.
서쪽 바닷길을 트는데는 끝내 실패한채
1584년 54세의 젊은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뇌출혈설과 타살설이 있다.

이반 4세에게 남겨진 아들이라곤
지적장애인이었던
표도르(Фёдор) 1세 뿐이었다.
이때부터 약 30년간
러시아에는 지독한 혼란기가 온다.
표도르 1세의 매형인 성직자 '보리스 고두노프(Борис Годунов)'는
섭정을 하던 중 표도르 1세가 죽자
아예 스스로 왕이 된다.

표도르 1세의 죽음은
류릭 왕조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류릭 왕가의 대는 완전히 끊어졌다.
다만, 그의 딸들을 통해 후손은 이어졌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공산주의자 스탈린이라고 하니
아이러니다.

러시아 귀족들은
폴란드, 스웨덴 등 외세를 끌어들여 권력싸움을 시작한다.
특히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은
표도르 1세의 아들로 일찍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드미트리 왕자가 살아있으므로
왕통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여러명의 가짜 드미트리를 앞세워
러시아를 거듭 침공했고
1610년에는
모스크바까지 점령해 버린다.

성 바실리 성당 앞에는
러시아 평민 두사람이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당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을 격퇴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던 러시아 시민 의용군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은
이 당시의 혼란스런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를 발표했다.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러시아 시민의 애국적 봉기에 촛점을 맞춘 극작품이다.
작곡가 무소르그스키는
이를 원작으로 직접 대본을 만들어
동명의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세계 100대 오페라 가운데
18위에 랭크될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로마노프 왕조의 시작)
러시아에는 2개의 왕조 밖에 없다.
류릭왕조와 로마노프 왕조가 그것이다.

이반 4세 사후
계속되었던 혼란기는
1613년
이반 4세의 황후였던
'아나스타샤 로마노프'의 오빠의 손자인
미하일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종식되었고
역사가들은
이 때부터를 로마노프 왕조라고 부른다.

***

다음회에선
붉은 광장, 크렘린 궁전 등을
돌아 보면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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