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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선
성 바실리 성당 한군데만
집중 조명해 봤는데
오늘은
성 바실리 성당을 포함해 크렘린 궁전, 굼 백화점 등
수많은 볼거리들이 몰려 있는
붉은 광장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본다.


 
 
 

 

(붉은 광장)

붉은 광장은 러시아어로
Красная Площадь (크라스나야 플로쌰지).
형용사 원형 красный (크라스늬)는
"빨간색의", "아름다운"의 두가지 뜻을 동시에 가진다.
그럼 '붉은 광장'일까 '아름다운 광장'일까.

이 광장은
아주 오래전 시장터였다고 한다.
이곳을 광장으로 조성하기 위해 가게들을 불사르고
상인들을 지금의 굼 백화점 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한동안
이 광장을 'пожар(빠좌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난 곳"이란 뜻이다.

이 광장을
Красная Площадь (크라스나야 플로쌰지) 라고
처음 이름 붙인 사람은
로마노프 왕조의 제2대 왕인
알렉세이 1세 (1629~1676)라고 한다.
물론 그의 원래 의도는
성 바실리 성당의 아름다움을 염두에 둔
"아름다운 광장"이었다.
그런데
후대에 암울한 적색 공산주의가 들어서면서
외국인들이 당근 "붉은 광장"일거라고 추측, 번역하기 시작한게
세계적으로 알려진 듯 싶다.

광장의  서편에는
크렘린 궁전이 면해 있고
북쪽으로는 역사박물관과 카잔성당,
동쪽으로는 굼백화점,
남쪽으로는 성 바실리 성당이 있다.

길이 330m, 넓이 70m의 이 광장은
각종 기념식, 열병식이 열리고
때로는 아이스링크로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세계적 가수들의 국제공연장으로도 쓰인다.
샤키라, 폴매카트니 등이 이곳에서 공연했다고 한다.

(롭나예 몌스타)
붉은 광장의
성 바실리 성당 근처에는
아주 오래된 이상한 구조물이 하나 있다.
표지판을 보면
лобное место(롭나예 몌스타)라고 되어 있다.
'처형장'이란 뜻이다.


 
лобное место(롭나예 몌스타)
 
 
 
(롭나예 몌스타, 연단인가 처형대인가)

과연 이 원형의 단 위에서 죄수를 처형했을까?

이 원형단은 1530년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반 4세(이반 뇌제)가 1547년
이 연단 위에서 연설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광장의 한 곳에서
중범죄자의 처형이 이뤄지기는 했으나
위 사진의 둥그런 연단에서
사람을 처형한 적은 없다는게 역사가들의 분석이다.
이름은 처형장이지만
황제의 연단이란 설이 맞을 것 같다.

(러시아 국립 역사박물관)
1872년 완공되어
알렉산드르 3세가 참석한 가운데
1883년 공식 개관했다.
붉은 벽돌과 은제지붕, 첨탑의 금빛 쌍두 독수리 등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건물에는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의 각종 유물과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러시아 국립 역사 박물관)
 

(카잔 성당)
1632년
로마노프 왕조의 초대 왕인
미하일 1세가
당시 모스크바를 침공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성당이다.
소련 공산당 시절
폭파되어 사라졌다가
1993년 복원되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카잔 성당)
 

(굼 백화점과 스탈린의 눈물)
전술한대로
붉은 광장의 상인들이 옮겨간
현재의 '굼 백화점' 터에는
로마노프 왕조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가 이탈리아 건축가를 초빙해서
멋진 상가를 건설했으나
1812년 나폴레옹 침략 때 불타 없어졌고
현재 건물은 1893년 복구한 것이다.
굼 백화점의 유리 지붕은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공법이라고 한다.

원래 이름은
Главный универсальный магазн (Гум),
(글라브늬 우니볘르살늬 마가진)
직역하면 "최고 종합 상점", 이니셜로 '굼'  백화점이다.

1917년 이후
소련 공산당 시절에는
이 백화점을 국유화하여 이름을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альный магазн (Гум)
(가수다르스트볜늬 우니볘르살늬 마가진)으로 바꾼다.
국영 백화점이란 뜻인데 약칭은 여전히 '굼'이었다.
계속 백화점으로 남아 있으면서
공산주의에 자본주의 시스템을 접목하는 시험대로 운용되다가
결국 1928년 판매를 중지하고
스탈린은 이 건물을 '경제 5개년 계획 위원회'의
사무실로 바꿔 버린다.

굼 백화점은 1953년에
다시 상가건물로 기능이 회복되지만
세계 2차 대전 직후엔
시장기능이 마비되고 생필품 공급부족 사태로 인해
백화점이라기 보다는 생필품 공급채널로 쓰인 모양이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굼 백화점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느라
붉은 광장에 수킬로미터의 줄을 서는
진풍경을 벌였다고 한다.

현재는
럭셔리 제품 유통업체가 소유하고 있으며
백화점 이름도
'가수다르스트볜늬'를 '글라브늬'로 원위치 시켰다.

 

 
(굼 백화점 전경과 내부)
 

이 굼 백화점은
스탈린의 두번째 아내 시신이
안치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스탈린의 두번째 아내 '나졔쥬다(Надежда)'는
23살 연하로, 아주 어릴 적에
스탈린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탈출했을 때
그녀의 집에 숨겨준 것이 인연이 되어
첫번째 아내가 죽은 뒤 1919년 18살의 나이로 결혼하게 된다.

그녀는
약간의 정신질환을 앓았으며
부부싸움이 잦았다고 한다.
1932년
어느 파티의 공개 석상에서
스탈린과 심한 말다툼을 벌인 뒤
크렘린 궁전의 아파트에서 권총 자살을 한다.

그녀의 빈소는
굼 백화점의 전시홀에 차려졌는데
당시 측근의 전언에 의하면
스탈린은 며칠이나 눈이 퉁퉁 불도록 울었으며
그가 개인적인 슬픔을 남에게 드러낸 것은
그때가 평생 처음이었다고 한다.

***

이 굼 백화점은
대부분 명품만 파니까
관광객들이 살거라곤 별로 없지만
남쪽 끝단에 있는
몇군데 선물가게는 가볼만 하다.
특히 마트료시카는
모스크바에서 사는게 물건도 다양하고
다른.곳보단 싸다고 한다.
가이드 언니는
그대신 호박을 살 사람은
에스토니아 갈 때까지 좀 참으라고 한다.
값이 싸면서 세공이 좋다고 한다.

자작나무로 만든 러시아 특산품 마트료시카. матрёшка, 허접스런건 몇 천원 짜리도 많지만 그림과 색칠이 정교하고 속에 여러개가 들어간 것은 수천 달러짜리도 있다.
 

(크렘린 성) 
크렘린 궁전은
붉은 광장에 왔어도 잘 보이지 않는다.
빨간 벽돌의 성벽만 보인다.
어디로 들어가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나중에 빙돌아서 입구를 찾아 들어갔어도
도무지 붉은 광장 옆에 있는게 맞는지도 아리송 하다.


(굼 백화점 안에서 내다본 크렘린 성벽과 크렘린 궁전, 정면에 보이는 작은 피라밋 구조물이 레닌 묘이다.)
 
 
(크렘린 성벽과 레닌묘, 스탈린이 우겨서 수십년째 방부처리되고 있는 레닌의 시신은 계속 존치할 것인지가 논쟁거리이다, 레닌묘 뒤쪽으로 성벽을 돌아가면서 러시아 전몰용사들의 묘와 기념 조형물들이 있다.)
 

크렘린 성의
위치를 좀더 입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아래 항공사진을 참고해 본다.

(나무숲과 성벽으로 둘러싸인 삼각형 블록 전체가 크렘린 성이다. '붉은 광장'은 우측 상단에 역사박물관과 굼백화점, 성 바실리 성당이 보이는 곳이다. 관광객들의 출입구는 좌중간의 첨탑이 있는 곳이다.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우리가 보통 크렘린 궁전이라고 부르지만
원래 이 삼각형 성곽의 이름은
모스크바 성(Московский Кремль, 마스코프스키 크례믈리)이다.
'크례믈리'란 단어는 보통명사로
"군사용 요새, 성채"를 뜻한다.
그러니까 모스크바 이외에도 크렘린은 여러 곳 있다.

이 크렘린 성은 보시다시피
모스크바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지대가 약간 높은 강변이라
적의 침입을 통제하기가 좋은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지역 통치세력들이
요새로 활용해 왔는데
류릭 왕조의 이반 3세(이반대제)가
성곽을 새로 쌓고 5개의 궁전 건물과 4개의 성당을 지어
왕실의 거주 및 집무장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푸틴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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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스카야 타워)
이 크렘린 성의 성곽에는
출입구나 경계용으로 쓰는 크고 작은 타워가
19개나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공식 출입구는 성 바실리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스파스카야 타워(Спасская башня)다.
'구세주 탑'이란 뜻이다

(성 바실리 성당 옆에 위치한 스파스카야 타워, 크렘린 성의 공식 입구, 1491년 축조)

 
스파스카야 타워를 포함해 몇개의 대형 탑 꼭대기에는 대형 붉은 별이 장식되어 있다.

과거에는 쌍두 독수리 청동상이 설치되어 있던 것을 공산정권 시절 붉은 별로 바뀐 것이다.  작아 보이지만 무게가 1톤에 달하는 거대한 별이다. '크렘린 별'이라고 부른다.

바람이 불면 돌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크렘린 별, 바람에 따라 회전하며 무게가 1톤에 달한다)
 

 

관광객들은
크렘린 성에 입장하려면
역사박물관 쪽으로 붉은 광장을 빠져 나와
왼쪽으로 빙 돌아서
'트로이츠카야' 타워로 가야 한다.

(꺼지지 않는 불꽃, 승마광장과 승마학교)
가는길에는
전몰용사를 위한 꺼지지 않는 불꽃을 비롯해
각종 조형물과 승마학교, 그리고
승마광장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전몰용사 추모를 위한 꺼지지 않는 불꽃, 타슈켄트의 꺼지지 않는 불꽃이 더 규모도 크고 멋있는 것 같다)
 
 
(크렘린 성벽을 따라 걷는 길에는 예쁜 실개천과 건물들이 압권이다)
 
 
(크렘린 성벽의 조형물과 분수)
 

(과거 왕실의 군사용 승마학교, 현재는 '중앙전시홀'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크렘린 성벽의 조형물과 분수)

 

위 건물은

1812년 나폴레옹 전쟁 승전 기념으로
1825년에 지어진 기마장교 양성 승마학교 건물이었다.
길이 180m, 넓이 45m의 대형 건물로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는게 특징이다.
일부 기록에선
왕의 마굿간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왕의 말들이 여기서 관리 됐는지는 몰라도
공식 용도는 승마 훈련장이다.

그래서
이 주변 광장의 이름도
승마광장 (Манежная площадь)이다.
1830년대 이후 이 건물은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1867년에는
베를리오즈와 루빈슈타인이 이 전시장에서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이 건물을 끼고 가다보면
크렘린 성의 입구가 나타난다.

(크렘린 성 안으로 들어가다)

 
(크렘린 성의 관광객 출입구)
 
(트로이츠카야 타워 : 크렘린 성의 관광객 출입구이자 크렘린 성곽 타워 중 가장 높은 타워)
 

현재
관광객 출입구로 사용되는
'트로이츠카야' 타워는 크렘린 성곽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트로이츠카야'는 "삼위일체"라는 뜻으로
문으로 연결된 다리이름도
"삼위일체" 다리다.

입구에 들어서니
궁전 건물들이 보인다.


 
(마침 외국 귀빈이라도 방문했는지 궁전 앞에 고급차와 경찰 오토바이가 대기중이다. 위병들도 부지런히 어디론가 가고 있다)
 
(푸틴의 집무실이 있다는 궁전 건물)
 

푸틴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 앞에 서니
참으로 역사의 소용돌이를 실감하게 된다.
1991년 동서 냉전이 종식되기 이전만해도
철의 장막이라고 불렸던 러시아,
그 중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웠던 장소,
크렘린 성안의 통치자 사무실을
이렇게 눈으로 바라 볼 수 있다니 말이다.

(이반대제 종탑)

(이반대제 종탑과 성모승천교회 종루)
 
 
이반 대제의 아들 바실리 3세는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1508년
가장 높은 종탑을 짓고 "이반대제 종탑"이라 명명한다.
위 사진의 오른 쪽 탑이다.
이 종탑은 81m 높이로
1900년대 전반까지는
모스크바에서 최고층의 건축물이었다고 한다.

이반대제 종탑의 왼쪽도
나중에 지어진 4층짜리 종루인데
모두 22개의 크고 작은 종이 있으며
그중 가장 큰 종은  무게가 65톤에 달한다.

(성모 승천교회)

(성모 승천교회)
 
 
 

러시아어로는
Успенский Собор (우스펜스키 사보르)인데
Успенский는 "성모 마리아의 영면, 승천"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Assumption 또는 Dormition 이라고 번역된다.
이반뇌제(이반4세) 때부터
이곳에서 황제의 대관식이 이뤄졌다.

(성모 수태고지 성당)

(성모 수태고지 성당)
 
 

Благовещенский собор(블라가볘씬스키 사보르)

영어로는
Cathedral of the Annunciation,
Благовещенский나 Annunciation는
성모 마리아의 수태고지 축일을 의미한다.
이 성당은
왕실의 가족예배용이었다고 한다,

(대천사장 성당)

Архангельский собор
(아르항겔스키 사보르)
Архангель, Archangel은
"천사장, 대천사"라는 뜻이다.
1200년대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목조 성당을 허물고
이탈리아 건축가를 초빙하여
1508년 석조로 다시 지었다.

이 성당에는
류릭 왕조의 왕과 왕손들이 묻혀 있다.
로마노프 왕조의 왕들은
대부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묻혔으나
유일하게 모스크바에서 죽은
표트르 2세가 이 곳에 묻혀 있어 눈길을 끈다.

(황제의 종)
성당들을 보고 나오는 길에
그 유명한 부서진 종, '황제의 종'이 보인다.

Царь–колокол
(차르 콜라칼)
'황제의 종'이다.

우선 이 거대한 종의 제원을 보면
높이 6.14m, 직경 6.6m, 두께 61cm,
무게 201.9톤.
깨어진 조각부분의 무게만도 10톤이다.
비록 부서졌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다.

청동이 주재료지만
525kg의 은과 72kg의 황금도 섞어 넣었다고 하니
값으로 계산해도 엄청난 종이다.

이 종의 주조가 완성된 것은
1735년
로마노프 왕조의 '안나' 여제 때인데
표면 조각 등 마무리 작업을 거의 완성시킨
1737년 대형 화재로 인해
불이 옮겨 붙었고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종은
이처럼 부서지게 되었다고 한다.

1812년
모스크바를 침공한
나폴레옹은
철수를 준비하면서
이 종을 전리품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너무 무거워서
침만 흘리고 돌아섰다는 전설이 있다.

(황제의 대포)
Царь-пушка
(차르 푸슈카)
이 대포 또한 어마어마한 거물이다.

(황제의 대포, 무기라기 보다는 조각예술 작품이다)
 
 
 
(대포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사람 없을 때 한장 찍으려고 기회를 보다가 일행을 놓치고 미아가 될 뻔 했다능...)
 
 

1586년
류릭 왕조의
표도르 1세때 주조된 대포인데
전쟁에서 실제 사용된 적은 없다고 한다.

구경이 890mm로
돌로 된 포탄을 쏘는 대포 중에선
세계 최대의 구경을 자랑한다.

원래 나무로 된
포신 거치대는 1812년 불타 없어지고
1835년 장식용으로 다시 만든 것으로
조각이 화려하다.

포신에도 아름다운 조각이 많다.
그래서 이 대포는 그저 장식용으로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었는데
현대에 들어
전문가들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포신에서 화약성분이 검출됨으로써
최소한 발사시험은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암튼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대포임에는 틀림이 없다.

***

이 정도로
크렘린 성 관광을 마치고
오늘의 마지막 포인트
"노보데비치 수도원"으로 이동.

(노보데비치 수도원)
Новодевичий монастырь
Novodevichy Convent

(노보데비치 수도원 전경)
 
 
위 사진으로만 봐도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무지 아름다운 곳일텐데
시간이 없어서
단지 우측의 노보데비치 호숫가에서
사진 한장 찍는 것으로 마무리.

이 호수는
차이코프스키가 자주 산책하면서
악상을 떠올린 곳이라고 한다.

이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아름답긴 하지만
러시아 황녀들의 한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앞으로
로마노프 왕조의 이야기에서
자세히 나오겠지만
많은 왕비와 공주들이 억울하게 갇혀서
죽어간 곳이기 때문이다.

(노보데비치 묘지)
수도원의 옆에는
수도원 넓이와 비슷한 노보데 비치 묘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번엔
들르지 못해 아쉽다.

이 묘지에는
안톤 체홉, 프로코피에프, 쇼스타코비치 등
소설가와 작곡가가 잠들어 있다고 한다.

(노보데비치 묘지)
 
 

다음에
모스크바를 방문하면
반나절 정도 시간을 내서
노보데비치 수도원과 묘지를 조용히 산책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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