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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점심식사를 마치자 마자

우리는

서둘러 러시아 국경도시 나르바(Narva)를 향해 달렸다.

가이드는

탈린에서 나르바까지 210 km,

나르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다시 160 km니까

거리도 만만치 않지만

러시아 출입국 사무소가

이유없이 입국심사를 질질 끄는 경우가 많다면서

잘못하면

오늘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못가고

중간에서 자야 할지도 모른단다.

 
 
 

6월 하순인데도 아직

군데 군데 유채 꽃이 피어 있는

끝 없는 에스토니아 평원을 두어시간 달리니

나르바(Narva)의

러시아 출입국 관리 사무소가 나타난다.

(에스토니아 나르바 출입국 관리 사무소)

 

과연

여권을 제출하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입국심사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버스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사진도 못찍게 한다.

가이드가 겨우 협상해서

단체로 화장실만 잠시 다녀올 수 있었다.

지체되는 이유도 잘 모른다.

무슨 컴퓨터가 다운 됐다느니 하는데

도무지 속내를 알 수가 없다.

기다리는 사이에

우리는

세관원에게 말해서

발트3국에서 쇼핑한 물건들 영수증에

스탬프를 받았다.

몇푼 되는 것도 아니고

환급될런지 확신할 수도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스탬프를 챙겼다.

3개월내에

EU국가를 여행하면서

공항에 있는 택스프리 청구함에 집어넣으면

환급이 된다고는 하는데...

한시간 반인가

거의 두시간정도를 기다려서

진이 거의 빠졌을 때 입국승인을 받았다.

참 힘든 나라다.

좀 지체되긴 했지만

오늘중 상트페테르부르크 호텔에서

잠을 잘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버스타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이 많다보니

가이드에게

러시아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다큐멘터리 비디오를 두편이나 볼 수 있었던 것은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착 전,

지난번 살펴 본 류릭 왕조의 역사 이야기에 이어

로마노프(Romanov) 왕조와 황제들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정리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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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

1584년 이반 뇌제의 사망 후

류릭 왕조의 왕통은 실질적으로 단절되었고

30년 가까이 혼란기를 거쳐

1613년

이반 뇌제의 황후였던

'아나스타샤 로마노프'의 후손

'미하일 1세'(Michael Romanov)가 등극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는 시작된다.

[로마노프 왕조(1613~1917) 가계도]

미하일1세(1613~1645) → 알렉시스(1645~1676) → 표도르3세(1676~1682) → 이반5세(1682~1696) → 표트르1세(1682~1725) → 예카테리나1세(1725~1727) → 표트르2세(1727~1730) → 안나(1730~1740) → 이반6세(1740~1741) → 엘리자벳(1741~1762) → 표트르3세(1762) → 예카테리나2세(1762~1796) → 파벨1세(1796~1801) → 알렉산드르1세(1801~1825) → 니콜라이1세(1825~1855) → 알렉산드르2세(1855~1881) → 알렉산드르3세(1881~1894) → 니콜라이2세(1894~1917)

(로마노프 왕조의 가계도, wiki에서 발췌 정리) ​

 

1917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볼셰비키 공산주의 혁명으로 퇴위하기까지

약 300년간 존속하면서

러시아를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올려 놓은

로마노프 왕조.

모두 18명의 왕 가운데

러시아의 경제·문화 부흥에 큰 획을 그었던

두 사람의 황제.

우리가 지금 향하고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를 건설하고 사랑했던

표트르 대제

(Peter I the Great, Пётр Великий)

예카테리나 대제

(Catherine II the Great, Екатерина Великая )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본다.

 

 

[표트르 대제 이야기]

(Пётр Великий, Peter I the Great, 1672~1725)

표트르 1세는

로마노프 왕조 2대 왕 알렉시스의

14번째 아이로 태어난다.

이미

알렉시스 왕의 첫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두 형이 있었으므로

두번째 부인의 소생인 그가

왕이 될 가능성은 상당히 낮은 편이었다.

(3순위 후계자가 왕위에 오르다)

근데

묘하게도

큰 형 표도르(Fyodor, Фёдор) 3세가

왕이 된지 6년만에 일찍 병사하고

1682년

둘째 형 이반 5세가 16세의 나이로 등극하게 되지만

일부 귀족들이 주도하여

이반 5세가 병약하고 심약하다는 이유로

당시 열살짜리 표트르 1세를 공동 왕으로 세우는

이변을 만들어 낸다.

또한

표트르 1세의 어머니 '나탈리아'가

섭정을 맡게 된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나탈리아'가 이반 5세를 암살하고

권력을 독점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반 5세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진상을 규명하라면서 대거 들고 일어난다.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린

'나탈리아'는

몰려든 귀족들 앞에

이반 5세가 멀쩡하게 살아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들끓던 정국은 겨우 가라 앉히지만

본인은 섭정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된다.

('나탈리아' 왕비가 이반 5세가 살아있음을 귀족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Nikolay Dmitriev-Orenburgskiy 작)

 

(소피아 공주의 섭정과 축출)

대신에

이복 누이 소피아 공주가 섭정(Regent)을 맡게 되었고

찬밥 신세가 된 표트르 1세는

잠시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나

어린 시절을 주로

독일인 기술자들이 일하는 마을에 가서

어린애 답게 전쟁놀이도 하고

목공, 철공 등을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자란다.

세월이 흘러

나이 17세가 됐을 때

표트르 1세는

은연중

귀족 세력을 규합하여,

그때까지도 권력을 놓지 않고 황제 자리까지 넘보는

소피아 공주를

섭정에서 축출하고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유폐시켜 버린다.

공동 왕인

형 이반 5세는 권력에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가

1696년 죽었고

이 때부터

표트르 1세의 본격적인 국가경영은 시작된다.

(표트르 1세의 청년시절)

 

청년 표트르 1세는

키가 203 cm (6피트 8인치)인데 반해

손과 발, 얼굴이 매우 작았다는 기록을 볼 때

젊었을 때는 거의

젓가락이 걸어다니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가냘픈 겉모습과 달리

약관의 표트르 1세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국가 대개혁을 꿈꾸다)

그는

러시아가

몽골 압제에서 벗어난지

백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안일과 구태에 빠져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러시아의 완전 개조를 꿈꾼다.

그는

우선 서유럽 국가들과의

긴밀한 교류가 국가발전에 필수 요소임을 간파하고

이를 위해서는

외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는 동시에

유럽 쪽으로 바닷길을 개척할 필요가 있다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서유럽에 비해

한참 미개한 수준의 경제·사회·문화 시스템과

특히

유럽으로 나갈 수 있는 바닷길이

막혀 있다는 것은 가장 커다란 약점이었다.

그래서

똘똘한 젊은이들을 선발해

외국에 유학시키는 한편으로는

유럽으로 연결되는 바닷길을 트기 위해

흑해의 항구도시를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한다.

하지만

당시 흑해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잘 훈련된

해군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군대는 대패하고 만다.

(서유럽 사절단으로 선진 문명을 배우다)

힘의 열세를 자각한

표트르 1세는

오스만 투르크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서유럽 나라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독자적으로

흑해 바닷길을 열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에

1697년

50명의 귀족과 200명의 수행원으로 이뤄진

대규모 사절단을 조직해

서유럽으로 장기 해외여행을 떠난다.

공식적인

사절단 단장은

명망있는 귀족 세 사람의 특사를 내세우고

본인은

의전상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의 평범한 단원으로 위장한다.

이렇게

여러 나라를 순회하면서

왕들과 정치인들을 만나지만

오스만 투르크를 치기 위해 힘을 모으자는

캠페인은 관심을 끌지 못한다.

사절단은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으나

이왕 유럽국가들을 방문한 것이니

이들의 선진문화와 기술을 마음껏 배워서

돌아가자는 방향으로

여행의 목적을 바꾸게 된다.

네덜란드,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에

서너달씩 체류하면서

직접 생산 현장에 취업하여

조선기술과 항해술을 배웠고,

군수공장 등 산업현장과 공연장, 박물관, 대학 등을 돌면서

선진 과학기술과 문화를 습득하고 체험했다.

표트르 1세의 서유럽 여행 기념 그림과 조형물들 (좌측: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인근의 잔담, Zaandam이란 도시에 있는 동상, 이곳 조선소에서 일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 중간: 조선기술, 항해술 이론을 배우는 표트르 1세, 우측: 영국 런던의 뎁포드, Deptford라는 동네에 세워진 동상, 이곳에 살면서 영국해양대학에서 조선기술을 배웠다. 표트르 대제는 망원경을 들고 있고 좌측의 궁정 어릿광대는 배와 지구본을 들고 있다. 우측엔 왕좌가 놓여있다. 표트르 대제의 큰 키와 작은 얼굴이 매우 인상적이다. )
 
 
 
 

각국의 러시아 대사관을 들러서는

조선 산업, 무기 생산 분야의 기술자들을 섭외하여

러시아로 보내라는 특명을 하달하기도 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을 방문해서는

당시 발틱 해안을 지배하고 있던

강대국 스웨덴에 대한 공동 전선을 구축하기로 협약하는 등

의외의 성과도 거둔다.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은

불과 수십년전만 해도

1610년, 연합국의 모스크바 침공,

1654~1667년, 러시아-연합국 13년 전쟁 등

숱한 싸움을 벌였던 나라인데

스웨덴이란 대적을 견제한다는 공동목적을 위해서는

선뜻 동맹을 맺는 시크한 외교술을 보여준다.

(개혁 반대세력의 잔인한 숙청)

표트르 1세의

서유럽 대장정은 모스크바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으로

1년반만에 끝나고 만다.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유폐되어 있는

소피아 공주의 추종세력들은

표트르 1세가

러시아의 옛 문화를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서유럽을 배운답시고

외국을 떠돌아다니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던 중

드디어 역모를 꾸민 것이다.

표트르 1세는

1698년 8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베니스로 이동하려고 준비하던 무렵

역모 소식을 듣고

즉시 모스크바로 귀환하여

반란세력을 진압한다.

(바실리 성당 광장에서 반역자를 처단하고 있다. The Morning of Streltsy Execution, Vasily Surikov 작)

 

(1600년대말 발틱 연안지역의 지도)

 

반란의 주축은

모스크바 크렘린을 지키던 근위병 부대(Streltsy, Стрельцы)였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단순히 처우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 설과

표트르 1세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의 선동 때문이란 설이 있는데

아무튼

표트르 1세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처형한다.

1,200여명이 사형당하고

수백명이 태형, 시베리아 귀양 등의 처벌을 받는다.

이들 근위대가 황제로 추대하려던

소피아 공주는

아예 머리를 깎고 수녀가 되게 했으며

노보데비치 수녀원의 독방에서

평생 아무도 접견을 허용하지 않은 가운데

고독한 죽음을 맞게 만든다.

(발틱 전쟁과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표트르 1세는

반란을 진압하자마자

그동안

서유럽을 돌면서 배우고 느낀 것들을

러시아 사회에 적용하기 시작한다.

우선

조선소를 설립해서

군함을 제작하는 동시에

본격적으로 해군을 양성하기 시작한다.

오스만 투르크는

더이상 건드리지 않기로 하고

그 대신에

발틱해로 바닷길을 트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추진한다.

그러나

발틱해를 이미 50여년 이상 지배하고 있던

스웨덴도 러시아가 쉽게 넘볼 수 있는 국가는 아니었다.

이반 뇌제조차도

발틱해 연안에서 수차례 전쟁을 벌였으나

이길 수 없었던 나라였다.

그 무렵

스웨덴은

핀란드는 물론

지금의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일부.

그리고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들어서 있는

잉그리아(Ingria) 지역까지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스웨덴 왕 찰스 12세(Charles XII)

표트르 1세보다 10살이나 어린 18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권좌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치와 향락과 술을 끊고

말 위에서 먹고 자고 하는 독종이었다고 한다.

표트르 1세는

드디어

1700년

3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잉그리아 지역을 처들어간다.

오늘

우리가 지나온

러시아-에스토니아 국경의 바로 그 도시 '나르바'에서

러시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과 공조하여

스웨덴과 한판 승부를 벌인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8천명의 스웨덴 정예군에게

맥없이 패배를 당하고 만다.

모든 지휘관을 잃고

완전 괴멸된 상태로 패퇴한다.

다행이

스웨덴 군은

러시아를 계속 공격해 들어 오지 않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과의

전쟁에 몰두했기 때문에

표트르 1세로서는 군대를 재편하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표트르 1세는

군비를 다시 확충하는 한편으로는

스웨덴 군사의 눈을 피해

1703년

잉그리아 지역의 니엔(Nyen)에

무작정

요새 건설을 시작한다.

이곳이 바로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토끼섬'이라 부르는 피터-폴 요새(Peter and Paul Fortress),

러시아어로

페트로파블롭스카야 크례파스치(Петропавловская крепость)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토끼섬, 피터-폴 요새, Peter and Paul Fortress)

 

당시 스웨덴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으로 바쁘기도 했지만

러시아 정도는 한주먹 거리 밖에 안된다는 생각으로

'얼마든지 요새를 만들어 봐라'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도로 빼앗아 올 수 있다'면서

그냥 방관했다고 한다.

과연

스웨덴 왕은 강했다.

1706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한 후

점차

러시아 중심부를 향해 진격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러시아 군대는 연전연패,

서부전선에서 모스크바 쪽으로 계속 밀리는데

설상가상으로

현재의 우크라이나 부근에 모여 살던

'카자크(Cossacks)' 종족의 반란이 일어난다.

'카자크' 족은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카자흐' 족(투르크계)와는 관계없는

슬라브계의 용맹한 기마민족이다.

율 브린너, 토니 커티스가 주연한 1962년작 미국영화

"대장 부리바(Taras Bulba)"가

바로 '카자크' 족의 이야기다.

이 카자크 족은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다가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면서

러시아 치하로 들어온 것인데

스웨덴의 진격을 틈타 독립투쟁에 나선 것이다.

스웨덴 왕은

이 카자크 족과 합세하여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러나

스웨덴 왕 찰스 12세의 운은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갑자기 유럽 전역에 500년래 최악의

강추위가 몰아닥친 가운데

후방 보급이 끊긴 스웨덴과 카자크 연합군은

우크라이나 '폴타바(Poltava)'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에게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다.

찰스 12세와 1,500명의 군사만 간신히 목숨을 건져

오스만 투르크 진영으로 망명한다.

이런 상황은

약 100년 후 나폴레옹이 침략해 왔을 때의 데자뷰다.

러시아는 참 추위 덕을 많이 보는 나라다.

1709년

'폴타바(Poltava)' 전투

스웨덴이 쇠망하는 시발점이 됐으며

러시아로서는

발틱 연안을 완전 장악하고 바닷길을 열 수 있게 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폴타바 전투, Battle of Poltava)

 

그후에도

표트르 1세는

수차례의 전쟁을 거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 지역은 물론

지금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핀란드까지

스웨덴에게서 빼앗았으며

결국 1721년

스웨덴의 항복을 받고 화친을 맺음으로써

22년간의

길고도 긴 발틱 전쟁을 끝맺게 된다.

(표트르 1세의 개혁 드라이브와 실패)

표트르 1세는

발틱 전쟁을 치르는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개조를 위해

여러가지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실시해 나간다.

표트르 1세는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국가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희생도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으며

자신의 솔선수범을 본받아

모든 백성과 귀족들이 흔쾌히 따라 줄 것이라고 믿었다.

청년기에는

왕이면서도 자원 입대하여

하급장교부터 시작해 순차적으로 승진해 올라 갔으며

해당 계급에 따라 받는 봉급 이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국익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라면

앞장서서 공부하고 기술을 습득했다.

당시로서는

보통 파격적인 행보가 아니었다.

서유럽식 각종 시스템을 도입했다.

과거의 구식 달력을 버리고 요즘의 율리우스 력을 채용했으며

복식제도도

서양식 양복을 입도록 바꿨으며

귀족들이 몽골식 긴 수염을 기르던 것을 금지하여

콧수염을 제외하곤

모두 깍아 버리도록 명령했다.

거부하는 자에겐 고액의 수염세를 부과했다.

귀족회의 대신 상원의원 제도를 만들고 행정관료 시스템도 개편하여

자신이 자리를 비웠을 때도

정국이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며

1713년에는

수도를 아예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한다.

이러한

표트르 1세의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에

러시아 백성과 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표트르 1세의 급진적인 개혁은

완전 실패로 끝난다.

어느 시대이건

개혁이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강력한 지도자의 고귀하고 빛나는 정신력이

온 국민들을 감화시키고

개혁에 동참시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은

매우 매우 순진한 발상이다.

전통 속에서 많은 이득을 누렸고

개혁을 하면 불편과 손해를 겪게 될 기득권 세력들은

결코

개혁에 동참하지 않을 뿐더러

개혁을 방해하려고

온갖 힘을 동원하게 되는 것이다.

표트르 1세가 죽은 후

러시아 귀족들은

모든 개혁정책을 중지했고

바뀐 시스템을 대부분 원래로 돌려 놓았다.

그러나

표트르 1세의 흔적을 다 지우기는 불가능 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러시아는 변했다.

과거엔

동양도, 서양도 아닌 애매한 정체성이

표트르 1세 이후

확실하게 서양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국제사회에서

러시아를 바라보는 시각도 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발틱해를 통해 서유럽과 연결된 러시아는

더이상 동쪽의 외딴 나라가 아니었다.

(표트르 1세의 두번째 왕비 예카테리나 1세의 공동왕 등극)

표트르 1세는

애정 문제에서도

대단히 독선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가 간택해 준

첫번째 부인과는 정을 느끼지 못했는지

1698년

서유럽 사절단에서 귀국하자마자

이혼하고 수녀원에 보내 버린다.

그리고

띠동갑 1684년생의 하녀출신 여인,

예카테리나와 한동안 애인으로 지내다가

171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성 이삭'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 표트르 1세는 그녀의 어떤 점에 그렇게 반했을까)
 
 

 

예카테리나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난무하는데

발틱 해변 지역의 농부 딸로 태어나

지금의 라트비아에 있는 어느 목사집에서

하녀 노릇을 하던 중

러시아의 한 장군이 발틱 전쟁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미색이 뛰어난 그녀를 모스크바로 데리고 왔다고 한다.

그 장군과 그녀의

자세한 관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 장군과 친구관계였던

표트르 1세가 그녀를 발견하고

한눈에 반해 애인으로 삼게 됐다는 것이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1704년 이후 아이들이 태어난 것을 감안 하면

최소한 두사람이 사귀기 시작한 것은

1703년 이전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표트르 1세가 그녀와 결혼하기까지

귀족들이나 주변에서는 엄청난 반대를 했을 것이다.

막상 결혼을 하고 나서도

귀족들은 그녀를 천한 것이라고

대놓고 무시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자

표트르 1세는

그녀를

왕으로 만들어 버린다.

자신과 동일한 반열의

공동 왕으로 세운다는 칙령을 반포하고

모든 신하들에게

그녀를

왕으로 대우하라고 명한다.

하녀에서

왕으로 신분이 수직 상승한

예카테리나 1세는 이렇게 탄생되었다.

물론

그녀가 왕으로서 한 일은 별로 없다.

다만

그녀의 이름이

불후의 여제 예카테리나 2세에게

이어졌을 뿐이다.

(아들 알렉세이의 반란과 처형)

표트르 1세의

첫 왕비에게서 태어난 아들로

왕통을 이을 수 있는 유일한 후계자였던

알렉세이(Alexei) 왕자가

1718년

아버지의 손에 처형당해 죽는

비운을 맞는다.

(비운의 왕자, Alexei Petrovich Romanov)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표트르 1세는

외아들을 처형할 수 밖에 없었을까.

알렉세이는 나이 8살 때

어머니가 이혼당하고 수녀원으로 쫓겨나는걸 보면서

은연중 아버지에게 원망을 가지게 된데다

아버지와 부자지간의 정을 쌓을 시간도 거의 가지지 못한채

주로 아버지의 개혁정책에 반대하는

귀족들에 둘러 싸여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그가

아버지처럼 강한 사명감과 야망을 가진 청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체질적으로 군대나 전쟁 등을 싫어하고

고고학이나 종교학 등 인문학을 좋아한 반면에

아버지는

자신의 핏줄이니만큼

당연히

자신의 개혁정책을 지지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서

국정운영의 훌륭한 오른 팔이 되어 줄 것을

기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표트르 1세는

수차례에 걸쳐

알렉세이 왕자에게

후계자로서의 자질도 육성할겸

여러가지 군사적 미션을 수행하도록

숙제를 주었는데

알렉세이는

처음엔

과제를 완수하려고 애쓰는 시늉이라도 했으나

점점 그것도 버거웠는지

아예 외국으로 도망쳐 버린다.

표트르 1세는

알렉세이에게

도망만 다닐게 아니라

결코 처벌하지 않을테니

일단 들어와서

후계자 노릇을 확실히 할건지 아니면

후계자 포기 선언을 하고 평민으로 살 건지 얘기를 해 보자고

설득해서 1718년 귀국하게 한다.

알렉세이는

귀국하면서 현지에서 사귄 하녀 출신 애인

아프로시냐(Afrosinya)를 동반한다.

그녀는

도착하자 마자 고문실로 끌려갔는데

수많은 고문기구를 보자

고문을 하기도 전에 다음과 같이 실토했다고 한다.

"알렉세이는

'아버지가 빨리 죽기를 원하며

자기가 황제가 되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다시 수도를 옮기고

배를 만들지도 않을 것이고 전쟁도 하지 않으며

군대는 방어용으로만 유지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설사 알렉세이가

평소 그런 생각을 갖고 그런 말을 했다손쳐도

이를 표트르 1세에게 고한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일로

알렉세이는

결국 투옥되고 재판을 받는 한편

아버지에게는

배후와 공모자를 대라면서 처절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틀에 걸쳐

태형 40대 이상을 맞았다고 한다.

이런 모진 고문을 견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알렉세이는

결국 내가 반역을 꿈꾸었노라고 자백했으며

상원의원 법정도

알렉세이의 유죄를 인정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사형선고 이틀 뒤 알렉세이는

갑자기 사망하는데

누군가 계획적으로 살해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태형 40대의 후유증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알렉세이를 고변한

'아프로시냐'란 여인은

그후

러시아 황실에서 챙겨준 재산을 가지고

외국으로 나가서

결혼도 하고 잘 살았다고 한다.

알렉세이가

죽은 다음 다음 날은

러시아가 '폴타바(Poltava)' 전투에서 승리한지

9주년이 되는 기념일이었다.

아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표트르 1세는

축포를 쏘면서 승전 기념행사를

예정대로 진행했다고 한다.

비정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국가 대사를 위해서는

어떤 사적인 일도 희생해 버리는

노블리스 오블리졔의

애국적 군주라 해야 할까.

(여름궁전, Peterhof 건설과 표트르 대제의 죽음)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1순위 관광 포인트인 '여름궁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궁전, Peterhof, Петергоф)
 
 

 

이 궁전은

발틱 해변에 바싹 붙어 있고

정원에서는 연일 시원한 분수를 뿜어내는 까닭에

전세계 관광객들이

"여름궁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작 러시아 사람들이

'여름궁전((Летний Дворец, 례뜨니 드바례츠)이라고 부르는 궁전은

네바 강변에 있는 다른 건물이고

이 궁전의 진짜 이름은

Большой Петергофский дворец

(발쇼이 페테르고프스키 드바례츠)

"표트르 대궁전"이다.

약칭으로

Peterhof, Петергоф(페테르고프)

또는 Петродворец(페트라 드바례츠) 라고도 부른다.

이런 이름이 붙은 건

바로 표트르 1세가 이 궁전을 짓기 시작한 때문인데

1705년 구상하기 시작해서

1714년 공사에 착수했다고 한다.

처음 구상할 때는

남부지역을 오가는 길에

잠시 머무는 숙소로 쓸 요량으로

바닷가에

몇 채의 건물을 짓는 정도로

소박하게 추진했으나

건설이 진행되면서 점차 욕심이 생겨

베르사이유 궁전을 능가하는 바닷가의 파라다이스를

건설해 보자는 식으로 확대된다.

표트르 1세는

정원의 호수와

펌프 없이 수압으로 작동하는 분수 시스템 등에 관한

대부분의 구상을 마련하지만

1725년

갑자기 사망하면서

오늘날의 멋진 '여름궁전'은

그의 딸, 엘리자벳 여제에 의해

완성된다.

그토록

에너제틱했던 표트르 1세가

5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게 된 원인은

분명하지 않으나

과음으로 인한 방광염을 수술치료받다가

감염된 때문이라는게 정설이다.

어떤 자료에는

표트르 1세가 신하들과 배를 타고 나갔다가

신하 한명이 물에 빠진 것을

직접 물에 뛰어 들어 구하느라

감기에 걸린게 잘못되어 죽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약간의 관련성은 있으나

사망의 직접 원인은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신하들도 있는데

황제가 왜 물에 뛰어 들었는지...

아들을 처형하는 아버지와

신하를 구하려 물에 뛰어드는 왕,

표트르 1세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평가하기란 참 쉽지 않다.

(표트르 1세의 사망 이후)

오늘날

표트르 1세(표트르 로마노프)는

표트르 대제

(Peter the Great, Пётр Великий, 표트르 벨리키)

라고 불린다.

대왕, 대제 를 뜻하는

the Great (Великий, 벨리키)가 붙는 왕은

우리나라의 경우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정도인 것처럼

러시아에선

이반 3세와 표트르 1세, 예카테리나 2세 정도다.

그가

후계자도 없이 갑자기 죽자

공동 왕이었던

예카테리나 1세가

잠시 러시아를 통치하지만

그녀도

2년후 남편 표트르를 따라 저 세상으로 간다.

처형당한 알렉세이의 아들이자

표트르 대제의 손자인

12살짜리 아이가

표트르 2세로 등극하지만

그도 역시 3년만에 죽어 버리면서

로마노프 왕조의

남자 혈통은 완전히 끊겨 버린다.

할 수 없이

표트르 대제의

조카딸인 '안나', 친딸인 '엘리자벳' 등이

10년, 20년씩 왕위를 이어가다가

이들마저 사라지자

엘리자벳의 조카이면서 표트르 대제의 외손자로

표트르 대제 사후에 태어나 줄곳 독일에서 생활해

러시아어도 하지 못하는

무지렁이를 표트르 3세로 세운다.

이때

표트르 3세의 아내로서

러시아에 함께 들어 온 독일 여인이

바로

나중에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는

예카테리나 2세(예카테리나 대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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