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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편의 표트르 대제 이야기에 이어서
예카테리나 대제에 관한 재밌는 이야기를
정리해 봅니다.

표트르 대제 이야기와

러시아 로마노프 왕실의  가계도는

아래 별도  포스팅을 참조하세요.

 

 

[러시아 역사여행] 4. 로마노프 왕조(1) 표트르 대제 (Пётр Великий)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야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점심식사를 마치자 마자 우리는 서둘러 러시아 국경도시 나르바(Narva)를 향해 달렸다. ​ 가이드는 탈린에서 나르바까지 210 km, 나르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다시 160 k

survival-russian.tistory.com

 

***

(표트르 대제 사후)

표트르 대제의 신데렐라이자
공동 왕이었던 예카테리나 1세는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 후 
왕권을  오롯이 혼자 차지하고 천하를 한번 호령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2년만에 죽는다.
폐결핵이었다고 한다.

그 후
표트르 대제에게 처형당한
비운의 왕자 알렉세이가 남긴 유일한 아들, 
표트르 2세가 
11살의 나이로 왕위를 잇지만
그도 3년만에 천연두로 죽어버린다.
이로써
로마노프 왕가의 남자 혈통은
완전히 끊어졌다.

하는 수 없이
표트르  대제의 이복 형인 이반 5세의 딸이자 
당시 왕실의 가장 어른이었던
안나(Anna Ivanovna)가 
왕위에 올라 10년간 통치한다.

안나의 집권 기간중
러시아-오스만 투르크 전쟁(1735~39)이 일어난다.
이 전쟁에서
안나 여제는 대승리를 거두고
그토록 염원했던 흑해의 아조프(Azov) 항구를
터키로부터 할애받는 등
꽤 큰 업적을 남기기도 한다.

 

 

[러시아 역사여행] 4. 로마노프 왕조(1) 표트르 대제 (Пётр Великий)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야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점심식사를 마치자 마자 우리는 서둘러 러시아 국경도시 나르바(Narva)를 향해 달렸다. ​ 가이드는 탈린에서 나르바까지 210 km, 나르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다시 160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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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여제, Empress Anna)

 

(표트르 대제 딸 엘리자벳의 등극)

 

그러나
안나 여제도 1740년
전쟁이 끝난 이듬해 병사하고 만다.
죽기 직전
먼 친척인 2개월짜리 간난아기를 양자로 입양해서
후계자 이반 6세로 세움으로써
자신의 아버지 이반 5세의 계보가 쭉 이어지도록
못박아 놓지만 오래가진 못한다.

표트르 대제가
예카테리나 1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엘리자벳(Elizabeth)'이
1년만에 무혈 쿠데타를 일으킨 때문이다.

원래
표트르 대제가 장수했다면
자연스럽게 
엘리자벳에게 왕위가 물려질 것으로
누구나 예상했을만큼
그녀에 대한 표트르 대제의 총애도 각별했지만
그보다는
그녀 자신의 외모나 성격, 능력 등이
표트르 대제를 가장 빼어 닮았다고 한다.

외모는
전러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꼽혔을 뿐 아니라
성격이 활달해 사교와 춤에 능했고
독어, 불어, 이탈리아어 등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데다
미술, 음악, 건축 등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아
일찌기 국제 외교무대의 재원으로 인정받은 
한마디로 팔방미인이었다.

이처럼 출중한
엘리자벳 공주가
사촌언니 '안나'의 등극까지는
참아줄 수 있었겠지만
출신도 한미한 입양아 이반 6세를 등에 업고
섭정의 권력을 휘두르는
'안나'의 애인이었던 귀족 '바이론'과 이반 6세의 생모 따위를
그냥 묵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안나 여제의 문고리들로부터
은근히 감시와 견제를 받아 왔던
엘리자벳은
"이것들이 보자보자하니 보자긴줄 아나"
하면서 이를 갈던중

1741년
은밀히 지지세력을 규합하고 근위대를 동원하여 
섭정과 이반 6세를 무능하고 부패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투옥시켜 버리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다.

 

(엘리자벳 여제, Empress Elizabeth)



엘리자벳은
아버지 표트르 1세의 개혁정책과 실패요인을 
아주 잘 아는 여인이었다.

그동안 후퇴했던
아버지의 여러가지 개혁정책들을
상당부분 재추진해 나가면서도
귀족과 백성들이 체질적으로 거부하는 것들,
즉, 아버지가 터무니없이 강요했던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 
인권탄압과 자유박탈 등은 최소화할 줄 아는
지혜로운 군주였다.

대내적으로는
아버지 표트르 대제에 뒤지지 않는 정치 감각으로
표트르 대제 사후에 없어졌던
상원의원 제도를 되살리는 동시에
정치 적폐로 지적되었던
독일인 위주의 외국인 정치고문들을 추방함으로써
러시아 귀족들의 지지를 끌어 모았다.

또 
모스크바 대학, 왕립예술학교 등 교육기관 설립을 통해
과학과 문화예술을 크게 진흥시켰다.
여성 특유의 감성을 살려
표트르 대제 죽음과 함께 중지됐던
여름궁전(Peterhof) 건설 사업을 다시 시작해
오늘날과 같은 멋진 모습으로 만들어 냈으며
로마노프 왕실의 상시 주거집무 공간인
겨울궁전도 완성시킨다.

대외적으로도 
주변국들과의 연합을 통해 
당시 유럽의 중심세력으로 떠오른 프로이센(독일)을 견제하고 
스웨덴의 반란세력을 재평정해서 복속시키는 등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한다.

당시
일각에선
엘리자벳 여제의
사치와 예산 낭비가
심하다는 비난을 하기도 했으나
후세의 사가들은
표트르 대제나 예카테리나 대제의 빛에 가려서 그렇지
그들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훌륭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더구나
그녀가 낭비해서 지은
여름궁전과 겨울궁전이 오늘날
러시아에 벌어주는 관광수입을 생각하면
얼마나 잘한 투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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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리나 대제 이야기]

(Catherine the Great, Екатерина Великая)

​이반 5세 쪽으로 잠시 빠졌던
표트르 대제의 계보를 어렵게 되찾아 온 
엘리자벳 여제는
평생 애인만 여러 명 두고 있었지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으므로
자신의 후계자에 대해서 상당히 고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왕통을 이어 받을만한 
표트르 대제의 핏줄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신히 찾아낸 것이
독일에 시집가서 살고 있는
친언니(Anna Petrovna)의 외아들 표트르 3세였다.

표트르 대제가 맏딸인
안나를 외국으로 시집보낸 것은
주요국 왕실과 혼맥을 통해
동맹관계를 확대한다는 정략결혼의 일환으로
프랑스, 독일 등에서 두루 신랑감을 물색하다가
지금의 북부 독일 지역을 다스리던
홀슈타인-고토르프(Holstein-Gottorp) 공국의 대공
'칼 프리드리히'와 결혼시킨다.

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표트르 3세다.
그러니까
표트르 대제의 외손자인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말을 하면서 자란 사람으로
러시아어를 배운 적이 없다.

아니
자국어 배우기를 싫어하고 경시했다.
이런 사람이라도
왕으로 모실 수 밖에 없었던  러시아의 앞날도 
참 암담했던게 아니었나 싶다.

엘리자벳 여제가
표트르 3세를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러시아로 불러 들인 것은
1744년.
이때 표트르 3세는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는데
신부는 독일의 안할트(Anhalt) 지역 영주의 딸인
'소피'(Sophie) 공주였다.
명망은 있지만 가난한 집안의 여식으로
엘리자벳 여제가
다리를 놓아 표트르 3세의 짝으로 맺어 준 것이었다.

[결혼 즈음의 예카테리나 2세(소피공주)와 표트르 3세]

 

당시 15살 소녀였던
소피 공주는
남편을 따라 러시아에 오자마자
현지화(Localization)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우선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
단어를 외우고 문장을 익히면서
졸지 않으려고 찬 돌바닥에 맨몸으로 누워서 공부하다가
앓아눕기도 하는 독한 모습을 보여준다,
언어 뿐만 아니라
러시아 왕실의 예법과 역사 문화를 몸에 익히기 위해서도
불철주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예카테리나'로 개명한 소피 공주)

아마도
소피 공주는
러시아어 배우기를 게을리 하고
러시아 문화를 하찮게 생각하는 남편 표트르 3세를 보면서
도저히 제국을 이끌만한 인재가 아님을 간파하고
스스로 황권 차지를 위한 준비를 미리미리 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소피 공주가
자신의 
친정집 반대를 무릅쓰고 
카톨릭 대신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까지 하면서
엘리자벳 여제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특히
자신의 이름을 
엘리자벳 여제의 어머니이자
표트르 대제의 사랑하는 공동왕이었던
'예카테리나'로
바꿔 줄 것을 간청하여 허락받는 등 일련의 행동을 볼 때
충분히 읽혀지는 짐작이다.

한때
황제의 이름이었던
'예카테리나'란 이름을 새로 얻게 된 소피 공주는
우선 이름 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미래 권력을 암시한 것이 아닐까.
대단한 전략적 발상이다.


(예카테리나 2세의 쿠데타)

엘리자벳 여제가 죽자
남편인 표트르 3세는 1762년 1월 즉위식을 갖고
왕좌에 오른다.

이 무렵
예카테리나는 남편 표트르 3세와 
완전 별거 상태였다.
예카테리나가 
외간남자들과 썸씽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표트르 3세는
1754년과 59년에 각각 태어난 두 아이가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는 의심을 가지고 예카테리나와 대판 싸운 후
수년간 소 닭 쳐다보 듯 지냈다고 한다.
소문이 시실인지
아니면 와전된 소문 때문에
예카테리나의 삶의 태도가 바뀌어 버린건지
알 수는 없다.

그녀는
그때부터 이미
암중 표트르 3세의 반대파들을 접촉해
자기 편으로 끌어 모으면서
남편을 제거할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절호의 찬스가 도래한다.

표트르 3세는
집권하자마자
프로이센과의 전쟁을 조기 종결시켜 버리고
빈민구제를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가뜩이나 불만을 가졌던 귀족들로부터 
더욱 더 외면받게 되는데...

표트르 3세도 나름
예카테리나의 반역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1762년 7월,
예카테리나의 측근 1명이 반역 혐의로 체포된다.
위기를 감지한 예카테리나는 그 즉시
자신의 지지세력이자 당시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수도방위사령부로 피신하여 
병사들에게 혁명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교회에서 황제 서임세례를 받자마자
기병대를 출병시켜 표트르 3세를 체포 구금한 후
양위각서에 서명하게 하는 등
일사불란하게 무혈혁명을 성공시킨다.
예카테리나 2세 여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의 쿠데타 거행일 겨울궁전 풍경, 병사들의 환호 속에 예카테리나가 발코니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

 


며칠 후
표트르 3세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예카테리나 2세가 애인으로 지낸 어느 귀족의 측근이 범인으로 검거되었다.
심증은 가는데
그녀의 공모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같은 우여곡절 끝에
왕위를 차지한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국익 증진에 수많은 업적을 남겨
오늘날
여성으로서 대제(the Great, Великая) 칭호를 받는 것만도
대단하지만
러시아 왕실과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 
대제국을 34년간이나 통치했다는 점에서
동서고금에 보기 힘든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예카테리나의 대관식)

그녀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1762년 9월,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모승천교회(Assumpthion Cathedral)에서 대관식을 갖고 
예카테리나 2세로 등극한다.


(예카테리나 2세 대관식, Stefano Torelli 작)
(모스크바 크렘린에 있는 성모승천교회와 예카테리나 2세의 대관식 당시 초상)

 

(예카테리나 2세의 대관식 왕관)



대관식에서
예카테리나 2세가 쓴 왕관은
프랑스 장인이
5천개의 다이아몬드와 75개의 진주
그리고
398캐럿짜리 첨정석(스피넬, Spinel)을 한알 한알 
붙여서 만든 세계적인 명품이다.
영국왕의 왕관에도
이 첨정석이 붙어 있는데
그 크기가 170 캐럿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예카테리나 왕관은
그 후
로마노프 왕조가 끝날 때까지
러시아 황제들의
대관식용 왕관으로 계속 사용된다.
지금은
모스크바 크렘린 안에 있는 무기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예카테리나 치세의 명암)

이렇게
화려했던 대관식만큼이나
예카테리나 대제의 업적은 눈부시다.
특히 
러시아 국토 확장에 기여한 바는 매우 크다.


<침략전쟁>

서쪽으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의 영토였던
지금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역과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일부 지역까지 러시아 땅으로 만들었고

남쪽으로는
그동안 간신히 발가락만 담갔던
흑해 지역에서
오스만 투르크와의
두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오늘날까지 세계 영토분쟁의 대명사가 되고 있는
크림반도 등 흑해 북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흑해 북서부에
거점도시 오데사(Odessa)를 새로 건설한다.

이렇게 해서
예카테리나 2세가 재임 중
러시아 영토로 새로 편입한 땅은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5배가 넘는다.

예카테리나 2세의
유난스런 땅 욕심은 당시 유럽 사회에서
아주 유명했던 모양이다.
당시 
아래와 같은
어떤 신문의 만평을 보면
그렇다.

("황제의 한걸음"이란 제목의 만평, 당시 유럽의 어떤 신문에 게재된 것인데, 예카테리나 2세가 러시아에서 콘스탄티노플, 즉 지금의 이스탄불까지 다리를 벌리고 있고 각국의 왕들이 치맛속을 올려다 보며 뭔가 중얼거리는 그림이다)



예카테리나 2세는
꼭 침략 전쟁이 아니더라도
각국의 분쟁에 끼어들어 중재하기를 좋아하는 등
유럽 전역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그 오지랍이 대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쨌든
예카테리나 2세 덕분에
러시아의 국제적 위상은 크게 향상되었다.

<문화·예술·교육>

이밖에
여성 황제인만큼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업적은 더욱 크다.

그녀는
스스로를
표트르 대제의 적통을 잇는 황제로 표방하면서
특히
표트르 대제가 주창했던
서유럽 문화 배우기를 통한 러시아의 부흥을 
지고지상의 정책과제로 삼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볼테르(Voltaire) 등
당시의 유명한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교류를 통해
그들의 사상을 러시아에 전파하고
직접 책을 저술해서 보급하기도 했으며
문화 사회 교육제도를 개혁하는 등
모든 사람들이
서유럽 문화에 익숙해지고
자신을 위대한 계몽군주로 인식해 주기를
바랬다고 한다.

(볼테르 흉상, 에르미타쥬 박물관 소장)




예술품 수집광이기도 한
예카테리나 2세는
새로 입주한
겨울궁전에서 살면서
수많은 예술품과 계몽주의 서적을 사들여
궁전을 장식하기 시작한다.

유럽의 많은 박물관들이
대부분 외국에서 약탈한 물건들을 전시해 놓는 경우가 많지만
러시아 박물관 전시품은 
모두 돈주고 산 물건들이라고 한다.

예카테리나 2세는
전 세계 대사관에 명령을 내려
진귀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나 예술품을
구입해 본국으로 보내도록 했다.
이렇게 입수한 소장품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공간이 모자라 건물을 증설 하기까지 한 
겨울궁전이 바로
오늘날
귀중한 예술품들로 꽉 차있는
에르미타쥬(Hermitage) 박물관이다.

<경제와 농노>

표트르 대제 때도 마찬가지지만
예카테리나 2세처럼
강력한 군주가 등장하여
전쟁 승리를 통해 국위를 떨치고 문화적 근대화를 이뤘다고 해서
반드시 백성들의 삶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러시아 경제는 오랫동안
농노 시스템에 의한 농업에 크게 의존해 왔기 때문에
광공업을 육성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서유럽에서 왕성하게 일어난 
산업혁명이나 기술혁신의 흐름에는
상당히 뒤처져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서유럽의 산업발전과 시민계급의 부상을
지켜 보면서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노들에게 자유를 주어서
농업에만 치우친
러시아 산업구조를 개선하고 공업발전을 도모하려는
마음을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농노와 땅을 소유한 귀족들의 반발을 의식해
농노 개혁에 실패할 뿐 아니라
농노제도를 더욱 고착시키고 악화시킨다.

이로 인해 
그녀의 생전에도 
적지않은 시민들의 폭동과 반란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결국
농노제는 시한폭탄처럼
차기 정권으로 계속 넘겨지다가
1861년 
예카테리나 2세의 증손자인
알렉산드르 2세 때에 가서야 폐지되지만
여러가지 부작용을 파생시키면서
나중엔 공산혁명의 뇌관이 되기도 한다.

<애인의 전설>

이처럼
에너지가 남달랐던 여인
예카테리나 2세는
남성 편력 면에서도 끝판왕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녀가
집권기간중
애인으로 삼았던 남자는 모두 22명이나 된다고 한다.
대부분 나이차가 많은
젊은 청년 귀족들이었는데
최연소 애인은 16살 짜리도 있었다는데...

이 애인들은
잠자리 파트너이기도 했고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으며
중요한 전쟁의 선봉장이 되기도 했다.
또 어떤 애인은
폴란드 왕의 자리에 앉혀 주기도 했다.

이렇게
다목적 용도의 애인으로
그녀의 눈에 한번 든 남자들에게는
관계를 중지한 다음, 즉 은퇴한 애인들에게도
섭섭치 않게 
부동산과 농노들을 선물로 주는
철저한 A/S를 제공했다는데
한때
이러한
애인 유지 보수를 위한 국가예산 지출은
전체의 10%를 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섹스 취향에 관해서는
매우 다양하고 망칙스런 소문들이 많다.
겨울궁전 안에
특별 주문하여 제작한
남녀 성기 모양의
에로틱한 가구와 장식물들이 가득한
애인 전용 침실이 있었다는 소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입에 담기 민망한 악플들이 더 많은데
증거도 없을 뿐더러 상식에도 너무 벗어난 것들이라
여기선 지면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언급을 회피한다.

 


(예카테리나 대제의 죽음과 파벨 1세)

동서고금에
가장 강력한 치맛바람으로 전세계를 휘둘렀던
여자 황제 예카테리나 2세도
생각보다는 이른 나이인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공식적으로는
욕실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지 하룻만인
1796년 11월 17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피터&amp;amp;middot;폴 성당에 안치된 예카테리나 대제, 죽어서는 남편인 표트르 3세 옆에 누워 있다)



예카테리나 대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그녀와 표트르 3세 사이의 아들인
'파벨 로마노프'(Paul Romanov, Павел Романов)가
40세를 넘는 나이에 왕좌를 이어 받는다.

원래
파벨 1세는 
엘리자벳 여왕 시절에 태어났는데
여왕이 이 아이를 너무 애지중지해서
낳자마자 당시 소피 공주였던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손에서 빼앗아
곁에 두고 직접 키웠기 때문에
모자간에 정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점점 크면서
어머니가 아버지 표트르 3세를 살해했을지 모른다는 의심과
자신이 물려받아야 했을 왕좌를
어머니가 차지한 것 같은 억울함 때문에
어머니를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예카테리나 대제도
이런 아들의 반감을 충분히 알고 쭉 감시를 해왔으며
그를 자신의 후계자 후보 명단에서
진작 제외시킨 것은 물론이고
파벨 1세를 건너 뛰어 손자인 알렉산드르 1세를
공식 후계자로 삼는다는
발표를 준비하던 중 사망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예카테리나 대제의 암살설이 떠돌기도 했다.

이렇게
권좌에 앉은 파벨 1세는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한 채
일관성 없는 정책 추진으로 비난만 받다가
5년만에 암살 당하고 만다.

로마노프 왕조는
이처럼
쿠데타와 암살이 점철되는
매우 불안한 양상을 보이면서도
끊임없이
로마노프의 이름으로 왕조가 이어지고
국력이 쇠하거나 크게 외세의 침탈을 받지 않는
행운을 가진 왕조라 아니할 수 없다.

로마제국, 몽골제국, 오스만 투르크, 나폴레옹, 대영제국, 독일 등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던 모든 제국들이
모두 한때의 영광으로 스러져 간데 반해서
뒤늦게 일어난
러시아 제국만은
그 지독한 공산주의 시대까지 거치고도
오늘날까지
세계 최대의 영토와 잠재력를 자랑하는
국력을 과시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는
이반대제,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대제로 이어지는
수차례의 강력한 국가부흥 드라이브 말고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

다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시내투어, 토끼섬(피터·폴 요새) 등을 관광하고
파벨 1세 이후의 로마노프 왕조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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