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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한 두어주일은 머물면서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레 공연도 보고 이곳저곳 구석구석 둘러봐야만 하는
관광자원의 보고라 할 수 있다.

2박 3일 정도 가지고는 턱도 없는 일정이지만 어쩌랴.
몇몇 하이라이트만 점을 찍는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시티투어 맵, Map)



위 지도를 따라서
주요 관광 포인트를 짚어 본다.

(넵스키 대로)
도시중심의
모든 길들은 방사선 형태로 퍼져 있고
그중 가장 큰 쇼핑거리가
바로 오른 쪽으로 뻗어 있는 넵스키 대로
(Невский проспект, 넵스키 프라스펙트)다.
이 거리는
1200년대 러시아의 대공을 지낸 전설적 영웅,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해군성)
이 거리의 서쪽 끝에는
러시아 해군 본부인
해군성(Admiralty)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의 뾰족한 금빛 첨탑은 매우 높아서
도시의 어디에서도 눈에 띠는
이정표 노릇을 한다.

(러시아 해군성)

***

 

(성 이삭 성당)
해군성의
바로 왼편으로는
'성 이삭' 성당(Saint Isaac's Cathedral,
Исаакиевский собор, 이사키예프스키 사보르)이 있다.

(성 이삭 성당)



1712년
표트르 대제는
바로 이 성당 자리에서
예카테리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성 이삭' 성당은
아주 작고 소박한 모양의 교회였다고 한다.

현재 모습의 성당은
1818년부터 1858년까지
40년이나 재건축 공사를 해서
알렉산드르 2세 때 완공된 건물로
규모도 커졌지만
돔에 순금 도금을 하고
내부 장식도 무지 화려한 교회로 변신했다.


(1712년 당시의 '성 이삭' 성당 그림과 현재의 화려한 성당 내부 모습)


성 이삭 성당 앞에는
거창한 기마 청동상이 성당을 마주보고 서 있는데
알렉산드르 2세의 아버지 니콜라이 1세다.
별로 업적도 없는 황제지만
아들을 잘 둔 덕에
죽어서도 동상 하나는 멋지다.

(성 이삭 성당 앞에 있는 니콜라이 1세 기마상, 말이 앞발을 두개 다 들고 있으면서 두개의 뒷발로만 청동상의 무게를 버틸 수 있게 만든 것은 당시로선 매우 힘든 기술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

(카잔 성당)
넵스키 대로를
동쪽으로 따라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카잔 성당 (Kazan Cathedral,
(Казанский собор, 카잔스키 사보르)이 보인다.


(카잔 성당 전경 )



이 성당은
로마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을 모델로 하여
1811년에 완공되었다.
현재
상트페테르브르그 주교가 집전하는
대성당이다.

1812년
모스크바까지 침공해 들어온 나폴레옹을
용감하게 격퇴시킨
러시아의 구국 영웅 '미하일 구투조프(Kutuzov)' 장군이
1813년 사망하자
그 유골을 이 성당에 안치한 것으로
유명하다.
  

(카잔 성당의 전면, 내부전경과 성당 양쪽에 서 있는 쿠투조프 장군 동상)


***

(싱어 하우스, Singer House)
카잔 성당의 건너편에는
얼핏 보기에 좀 특이하긴 하지만
별로 대단할 것도 없어 보이는 5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는데
유심히 들여다 보면
역사적으로 꽤 의미가 있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카잔 성당 맞은편의 '싱어 하우스')


현재는
대형 서점이 들어서 있어서
'서점(Дом книги, 돔 크니기)'이란 간판을 달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꼼빠니야 징게르'(Компания Зингеръ)라는
더 큰 표지판이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어로 '싱어社'(Singer Company)라는 뜻이다.
왜 미국 재봉틀 회사 이름이 붙어 있을까?

 

 

(싱어 하우스의 유리 지구본 첨탑, 미국 독수리 조각)


원래
이 코너 땅은
안나 여제의 애인이었던
바이론 공의 승마학교 소재지였는데
화재로 소실된 후 한동안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가
1904년,
당시 재봉틀 판매 붐으로
세계적인 회사가 된 미국의 '싱어' 사가
러시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이 부지를 사들여
지사 사무소를 건립했다고 한다.

야심만만했던
싱어 사는
러시아에서 최고 높은 마천루를 지을 생각이었으나
당시 황법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내의
모든 건물은 겨울궁전보다 높게 지을 수 없다고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편법으로 올린게 바로 위 사진에 보이는
아름다운 유리 첨탑과 지구본이라고 한다.
그리고
첨탑 한 가운데에는
떡하니
미국의 국가 상징인
독수리 조각을 해 붙인 것이다.

그러나
공산정권 수립 후
이 건물은 국유화 되었고
국영 출판사들의 사무실로 쓰이다가
오늘날은 서점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

(피의 구원 사원)
카잔 성당 맞은 편 길로
싱어 하우스를 지나
운하를 따라 좀 더 올라가면
성 바실리 성당만큼이나 아름다운
'피의 구원 사원'
(Church of the Savior on Blood)
(Церковь Спаса на Крови, 체르코비 스파사 나 크로비)
을 만날 수 있다.

(피의 구원 사원, 가는 길 옆으로는 아주 큰 무지개가 떴다)

 

  

이 '피의 구원' 사원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말기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1818~1881)가 암살된
바로 그 자리에 건설된 성당이다.

알렉산드르 2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짓기 시작해서
그 손자인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907년 완공했다.

겉 모양은
모스크바의 바실리 성당을 많이 본 땄는데
아들, 손자가
대를 이어 정성을 다 한 만큼
이 성당의 내부 장식은
바실리 성당 보다 훨씬 화려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성당의 모자이크 벽화는
그림 면적 기준으로
세계 최대이면서 가장 정교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피의 구원' 사원 내부 모자이크 그림들, 사진출처: dreamstime.com)

 

***

로마노프 왕조에 대해서는
전편에서
예카테리나 대제가 사망한 후
그녀의 아들 파벨 1세가 집권했다가
5년 만에 암살 당한 것까지 이야기했었는데
새로운 왕들의 이름이 계속 등장하는
이 대목에서
로마노프 왕가의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가 본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이야기)

파벨 1세를 암살한 사람은
주보프(Zubov)가의 4형제 가운데 맏형인
'니콜라이 주보프' (Nikolay Zubov)라고 한다.

예카테리나 대제 당시
'주보프' 가문은
러시아 제일의 세도가였다.
주보프 형제중
세째와 네째가 모두 황제의 연인으로
권력의 정점에 있었고
나머지 형제들도
러시아 군대의 장군들이었으니
그럴만도 했을 것이다.

예카테리나 대제가
아들 파벨 1세를 제쳐 두고
손자인 알렉산드르 1세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준비하던 중 사망하게 되자
파벨 1세는
이게 웬 떡이냐 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니콜라이 주보프' 는
예카테리나 대제가 사망하자 마자
파벨 1세의 등극을 축하하러 찾아가
제일 먼저 눈도장을 찍으려고 시도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할 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과 함께 느닷없는 추방명령을 받게 된다.

파벨 1세로서는
'주보프' 형제들이 모두
예카테리나 대제의 측근이었으므로
자신을 내 쫓고 알렉산드르 1세를 옹립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5년후인
1801년
추방령이 해제되자
'니콜라이 주보프'는 공모자를 규합한 후
황제의 침실에 침투하여
파벨 1세를 시해한다.

꼬리 흔드는 개를 걷어 찼다가
오히려 물려 죽은 꼴이다.

(알렉산드르 1세)
파벨 1세의 아들
알렉산드르 1세는
1801년부터 1825년까지
24년간 권좌에 있으면서
농노제 폐지 등 사회개혁을 시도하지만
성공하지는 못한다.

당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럽 패권을 차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영국과 손잡고 프랑스 견제 정책을 추진한다.
나폴레옹이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해 오자
강추위 덕을 많이 보긴 했으나
쿠투조프 장군과 함께 절묘한 치고 빠지기 전술로
프랑스 군대를 대파하고
프랑스 본토까지 점령하는
개가를 올린다.


(알렉산드르 1세 기마상, 겨울궁전 소장품)


(니콜라이 1세)
알렉산드르 1세가
후계자 없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니콜라이 1세가 등극하여
1825년부터 1855년까지
30년간 집권한다.

이 시기는
서유럽 각국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던 때라서
니콜라이 1세는
자기 대에서 왕정이 무너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국내외적으로 무자비한 탄압과 통제를 하고
무력을 휘두른 것 외에
별다른 족적을 남긴 것이 없는 황제다.
망해가는 제국의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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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2세)
니콜라이 1세의 아들로
38살의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2세는
1855년부터 1881년까지
25년간 집권하면서
아버지보다 훨씬 많은 업적을 남긴다.
적어도
아버지처럼 정치하지는 말아야지 하고
별렀던 사람 같다.


(알렉산드르 2세)



특히
1861년
러시아 제국의 고질적인
사회문제의 뇌관이었던
농노제를 폐지한 것은 그의 가장 큰 업적이다.
미국의 노예해방도
1865년 남북전쟁 종료 이후에 이뤄진 것이므로
미국보다도 한발 앞선 것이다.

게다가
귀족들에게도 병역 의무를 지게 하여
사회 전반의 신분, 계급간 차별을 없애고
공개재판, 배심원 제도 도입 등 사법제도 개혁을 통해
공정하고 효율적인 재판이 이뤄지게 하는 등
알렉산드르 2세의
사회정의를 향한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또한
그 당시까지도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핀란드에 대해서는
대폭적인 자치권을 허용했으며,
터키와의 전쟁에서 이긴 후엔
불가리아를 터키에서 떼어내 독립시켜 주기도 한다.
스웨덴이나 터키 등 인근 적대국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여하튼
아직도 핀란드나 불가리아 국민들은
알렉산드르 2세를 훌륭한 '해방 황제'로
칭송한다고 한다.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중심에 서있는 알렉산드르 2세 동상, 수도에 남의 나라 황제 동상이 서있는 것은 매우 이색적이다)




(알래스카 매각)
그러나
1867년
알래스카 땅을 미국에 팔아버린 것은
알렉산드르 2세의 큰 실책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원래
알래스카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에스키모들의 얼음 밭으로
1600년대부터  러시아 탐험가들이 조금씩 드나들다가
1700년대초 표트르 대제가 탐사를 지시하여
1732년 안나 여제가
러시아 식민지로 공식 편입한 땅이다.

그런데
미국정부는
이 쓸모없어 보이는 땅에 눈독을 들인다.
당시만 해도 캐나다가 영국 땅이었기 때문에
알래스카를 사들이면
캐나다를 가운데 두고 영국을 견제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오퍼로 매매 협상이 시작됐는데
최종 합의된 매매 가격은
단돈 720만 달러.

당시 알렉산드르 2세는
전쟁 때문에 국고가 비어 돈이 필요했다곤 하지만
땅을 팔아 먹을 만큼 곤궁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가 알래스카를 헐값에 팔아 버린 것은
아마도 이 땅의 가치에 대한 계산 착오 때문일 것이다.
쓸모 없는 땅이라는 생각이 강했고
당시 강대국인 영국이 맘만 먹으면
돈 한 푼 안내고 그 땅을 뺏어가도 할 말이 없는 판인데
미국이 돈을 주고 사겠다니
불감청 고소원이 아니었나 싶다.

미국의
일부 정치인들도
"이 정권이 정말 미친 짓을 했다.
국내에 돈 쓸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저 백곰이나 사는 쓰잘데기 없는 얼음 땅을,
그것도 본토에서 뚝 떨어져 관리하기도 어려운 맹지를
돈 주고 사다니 말이다"
라면서 엄청 비난했다고 하니
당시 러시아 국민들은 거꾸로 알렉산드르 2세를
현명한 군주라고
칭찬했던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은 자원의 보고인 알래스카 땅을 두고
러시아 사람들이 얼마나 땅을 치며
아까워 할지...

그 대신에
알렉산드르 2세는
청나라의 아편전쟁에 끼어들어
연해주 지역을 중국에서 빼앗아 오는 개가를 올린다.
러시아로서는 둘도 없는 승전보였겠지만
원래 연해주 땅의 주인이었던
우리나라 대한민국으로서는
아주 안타깝고 씁쓸한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암살)
이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던
알렉산드르 2세에겐
칭송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극렬 반체제 혁명파도 많아서.
암살 시도가 한 두번 있었던게 아니라고 한다.

1881년 3월
지금의 '피의 구원' 사원 자리를 지나는데
마차 앞에 폭탄이 터졌다.
방탄 마차라서 황제는 다치지 않았지만
많은 경호원들이 죽었다.
황제가
상황파악을 위해 마차에서 내렸을 때
또 하나의 테러범이 뛰어 들어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알렉산드르 2세는
치명상을 입고 겨울궁전으로 옮겨져
거기서 숨을 거둔다.

***

(알렉산드르 3세)
개혁군주
알렉산드르 2세가 갑작스레 죽지만 않았다면
러시아가 공산화되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알렉산드르 2세는
촛불이 꺼지기 전에 한번
반짝 빛을 발한다는 그런 존재였을까?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는 준비된 황제감이 아니었다.
황태자인 형이 병으로 죽으면서
느닷없이 후계자가 되었는데
원래 성격마저도
자유분방하고 단순무지였던지라
아버지 암살 사건에 대한 원한을 온 백성들에게 돌려
백성이란 잘해줘 봐야 소용없는 존재라는 옹졸한 생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반 체제 인사를 색출 처단하는데만
온갖 신경을 쓴다.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알렉산드르 3세가
집권 13년만에 건강 악화로 급사하자
아들 니콜라이 2세가 마지막 황제로 등극하는데
그는 아버지보다도 훨씬 준비가 덜 된
유약하고 개념없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에게 배운거라곤
그저 백성을 총칼로 탄압해서 왕권을 지키는 일 뿐이었다.

더구나
니콜라이 2세와 그의 부인은
'라스푸틴'이란 요승의 꼬임에 넘어가
국정을 완전히 농단 당한다.


(라스푸틴, Rasputin)


아들 알렉세이의
불치병을 고쳐 줬다고 믿고
근본없는 떠돌이 예언자 '라스푸틴'을 신처럼 의지한
니콜라이 2세는
정치, 경제, 군사 모든 면에서 그의 지시를 받아
서로 가라면 서로 가고 동으로 가라면 동으로 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란 멀쩡한 도시 이름을
갑자기 '페트로그라드'로 바꾼 것도
어쩌면 '라스푸틴'이 시킨 일이 아닐까.
망하는 군주들이 저지르는 공통적인 행태는
바로 이런 푸닥거리 같은 짓 뿐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말은
그 때 러시아 시민들이 처음 썼던 말인지도 모른다.
시민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났고
이듬해
니콜라이 2세는
총살형을 받고 세상을 하직한다.
화려했던
로마노프 왕조도
그 종말은
이처럼 초라했다.

(오로라 순양함)
여기서
로마노프 왕조 이후의
공산주의 시대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

러시아 국민은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자유와 인권을 잃어버린 채
수십 년 간을 철의 장막 속에 갇혀 있었을 뿐 아니라
경제발전은 지체되어
1991년 민주화 된 지 28년이 되는
2017년 현재까지도
1 인당 GDP가
전세계 평균치인 1만 달러에도 못 미치는
8,500달러 정도에
머물고 있다.
표트르 대제가
땅 속에서 땅을 칠 일이다.

당시
세계 1차 대전의 장기화와
정부의 무능으로
궁핍해질 대로 궁핍해진
시민들은 순수하게
빵을 먹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시위에 나섰고 힘을 뭉친 것 뿐이었다.
근데
그 순수성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네바강 하구에 정박해 있는 오로라 순양함)


이 오래된 배는
이제 현역에서 은퇴하고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지만
1900년 건조된 이래 수십년동안
러일전쟁, 제1차, 2차 세계대전 등에 참전한
역전의 군함이다.

이 배는
부서지고 가라앉고
온갖 전쟁의 상흔을 안고 있을 뿐 아니라
1917년 시민혁명 때에는
승선한 병사들이
시민과 자유 편에 서서
시위에 동참하고 부패세력을 향해 공포를 쏨으로써
시민혁명을 승리로 이끈 조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시민들의 한 마음 한 뜻은
볼셰비키들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볼셰비키란
러시아 제정이 무너지고
주된 통치 세력으로 떠오른 사회주의 노동당 중에서도
붉은 깃발의 '레닌'이 이끈

극렬 공산주의 다수파 정당을 말하는데
치열한 권력투쟁 속에서

최종적으로 볼세비키가
득세하고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
오호 통재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한반도 남북분단의 원흉이랄 수 있는

소련의 태동이었던 것이다. 

***

'피의 구원' 사원에 이어 돌아 본
겨울궁전과 토끼섬은 별도 포스팅을 하겠지만
이번에 시간이 없어 놓친 관광 포인트 중
다음이라도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은 곳들은 아주 많다.


(러시아 국립 박물관)



그중에서도
'피의 구원' 사원 근처에 있는
러시아 국립 박물관.
(Russian Museum)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Русский музей),
소장품이 가장 많다고 한다.

 

(알렉산더 넵스키 사원)


넵스키 대로 동쪽 끝에 위치한
알렉산더 넵스키 사원
(Alexander Nevsky Monastery)
(Александро-Невская лавра)

표트르 대제가
자신의 조상이자 영웅인
알렉산더 넵스키 대공이
1240년
스웨덴 군을 크게 무찌른 장소에 건설한 사원이라고 한다.

'차이코프스키', '무소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
'루빈슈타인' 등 많은 러시아 음악가들과
대문호 '효도르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사원의 묘지에 잠들어 있다.

***

다음은
네바강 해상투어와

겨울궁전 및 토끼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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