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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 대성당에서 출발해
도보로 구시가지를 구석구석 돌아본다.

게디미나스 성에서
연두색으로 내려다 보이던
대통령궁이 나타난다.

(대통령궁)



철갑기사가
십자가 방패를 들고 칼을 머리 위로 쳐든채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기독교적인 리투아니아 국가 문장(Coat of Arms)이
건물 중앙에 선명하다.

 

 

이 대통령궁의 주인은
2009년부터 8년째 집권하고 있는
(Dalia Grybauskaite)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체' 대통령,
"철의 여인", "강철목련"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여자 대통령이라고 한다.
2014년 선거에서 재선됐다고 하니
정치를 아주 잘하는 모양이다.
부럽다.

***

(빌뉴스 대학교)
대통령궁 바로 왼편에는
빌뉴스 대학교가 바로 붙어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 시절인
1579년 설립된,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깊은 대학교라고 한다.

 

 
 
(빌뉴스 대학교, 같은 시간에 찍은 사진인데 먹장구름과 파란 하늘이 혼재한다, 우측은 대학 도서관 현관, 1547년 리투아니아는 자국언어로 된 교리문답집을 처음 출판했으며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긴다. 이를 기념하는 도서관 현관의 동판부조 장식물)
 


(Signataru Namai)
빌뉴스 대학을 끼고 돌면
'Signataru Namai' (시그나타루 나마이)란
 이름이 새겨진 예쁜 건물을 만난다.
"서명의 집"이란 뜻이다.

 

(시그나타루 나마이, Signataru Namai, 서명의 집)
 

 

이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지만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건물이라고 한다.

리투아니아는
1700년대말 폴란드와의 연합제체가 붕괴된 후
점차 친러시아로 기울다가
어느덧 러시아에 자주권을 빼앗겨서
 자국어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탄압받는 신세로 한동안 전락했다가 
1915년에는
세계1차대전을 일으킨
독일군에게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는다.

바로 이때
리투아니아의 뜻있는
사회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20인의 독립운동 대표들은
1918년 2월
바로 이 집에서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서명하고 공표했다고 한다.

당시
독일 군대가 주둔해
 양국합병을 추진하면서 언론통제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리투아니아 국민의 독립의지를 
국내외에 천명한 사건이다.

우리나라의
기미년 3.1 독립선언문과 시기나 형식에 비슷한 점이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리투아니아는
1918년 11월
독일의 패전으로
 독립선언의 결실을 맺은데 반해
우리는
그런 행운을 얻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리투아니아는
독일군이 철수하자마자
재빠르게 독립정부를 구성하고 군대를 편성하여,
재침략을 획책하는 러시아에 당당히 맞서 싸움으로써
평화협정을 얻어낸다.

그러나
이번엔 폴란드 군대가
빌뉴스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침략해 들어왔으며
리투아니아는
다시한번 사면초가의 전쟁터로 변한다.

이처럼
편할날 없이 20여년이 흐른 어느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1941년 또다시
리투아니아를 낼름 집어 삼켜 버리니
이 무슨 애꿎은 국운이란 말인가.
구한말의 우리나라 역사보다도
더 비참할 지경이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당시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얼마나 러시아와 폴란드 군대에 시달렸는지
독일군을 해방군이라면서
크게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1945년
독일이 또다시 패퇴하고
  러시아가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자
 리투아니아는
더이상 버틸 힘도 없이
철의 장막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그리고
40여년 후
지긋지긋했던 외세로부터
겨우 독립을 하게 된 리투아니아 국민들에게는
아마도
'Signataru Namai'가 가지는
의미가 정말 남다를 것 같다.

***

 

 
 
(무명 예술가들의 작품들이 걸려 있는 문학의 거리, Literatu Street)
 
(성 미하일 교회, 1600년대초에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교회)
 

 


(성 안나 교회)
빌뉴스에는
오래되고 예쁜 교회 건물들이 유난히 많은데
그중 단연 최고의
교회가 바로 '성 안나' 교회(St. Anne Church)다.

 

 
(성 안나 교회와 내부 제단)
 

 

1500년에 완공된
 고딕양식의 '성 안나' 교회는
빌뉴스의 구시가지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데 큰 몫을 할만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건축물이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느라
빌뉴스를 지나갈 때 성 안나 교회를 보고
"한손에 쥐어 파리로 가져 갔으면 좋겠다"
면서 아쉬워 했다는 전설도 있다.

 

(성 파라스케바 교회, Church of St. Paraskeva)
 

 

(성 파라스케바 교회)
위 사진의 교회는
성 파라스케바 교회로
아담하고 소박해 보여 눈에 잘 안띄지만
꽤 유서깊은 성당이라고 한다.

리투아니아 광개토대왕이라 할 수 있는
게디미나스 왕의 아들로
리투아니아 영토확장에도 공이 컸던
알지르다스(Algirdas) 왕자의 첫번째 아내가 
1345년 지은 교회라는데

재미있는건
 1705년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역의 패권을 놓고
스웨덴과 한판 승부를 벌였을 당시
이 교회에 잠시 들러 승전 기원예배를 드렸으며

더 재밌는건
그 예배 도중에
당시 9살이었던 '아브람 간니발(또는 한니발)'
'Abram Gannibal (Hannibal)'
의 세례식이 거행됐으며
그의 대부는 표트르 대제였다고 한다.

'간니발'이란 사람은 
어렸을 때
 아프리카의 카메룬인가 에티오피아인가에서 납치되었는데
어떻게 표트르 대제 눈에 띈 것인지 모르지만
표트르 대제가 입양하여 교육을 시켰으며
나중엔 포트르 대제의 딸 '엘리자벳'이 
러시아를 통치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재밌는건 그게 아니라
그 '간니발'이 바로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의 외가쪽 증조부라는 사실이다.
역사와 사람은 참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얽혀 있음을 느낀다.

***

 

(빌뉴스 시청 앞 광장)
 

 

골목을 지나
시청앞 광장으로 나와
시청 왼쪽 길로 올라가면
또 하나의 바로크 양식 교회가 하나 나온다.

 

(성 테레사 교회, Church of St. Teresa)
 
 
(성 테레서 교회와 붙어있는 새벽의 문, 소련시절에는 로마교황의 방문이 금지됐었는데 독립 이후 처음으로 1993년 교황 바오로 2세가 리투아니아를 방문했으며, 그 때 이 곳에도 들렀다고 한다.)
 
(새벽의 문 2충에 있는 예배당)
 

 

성 테레사 교회는
맨발의 카르멜 수녀회 소속으로
1654년 건축되었는데 본당 보다도
이 교회에 붙어 있는 '새벽의 문' 예배당 때문에 더 유명하다.
'새벽의 문'(Gate of Dawn)은
옛날 빌뉴스의 9개 성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문으로
그 2층의 예배당에는 황금 빛 모 마리아 그림의 제단이 있어
리투아니아 시민들이 소원을 빌 때 찾는 곳이라고 한다.
너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진 찍기가 어려운 곳이라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사람이 많지 않아서 좋군요.

***

자 이제 출출하니
식사를 하러 가볼까요.
패키지팀을 무작정 따라 다니다 보니
식당 이름은 잘 모르겠군요. 

 

(시청앞 광장에서 내려 오는 길의 분수대와 성 니콜라스 교회, 이 교회는 알지르다스 왕자의 두번째 아내가 지었다고 하는데 당시 왕실 여인들은 우리나라 고려나 조선의 왕비들이 절 짓듯이 교회를 지은 모양임 )
 

 

시청 쪽으로 다시 내려와서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니 
곰돌이가 서있는 전통 리투아니아 음식점이 있습니다.

 

 
(세펠리나이, Cepelinai)
 

 

어느 나라나
전통음식이 있기 마련인데
바로 이 '세펠리나이' (Cepelinai)란 음식이
리투아니아의 전통요리라고 하네요,

언뜻 보면 그냥 알감자 같은데
사실은 감자를 갈아서 만든 반죽에
고기 소를 넣고 찐 음식이더군요.

특별히 감동을 주는 맛은 아니었지만
음~ 꽤 독특한 음식이네 하는 정도.

 

(성 테오토코스 성당, Cathedral of St. Theotokos, 알지르다스 왕자가 두번째 왕비를 위해 지어 줬다는 교회)
 

***

다음은
트라카이 성과 샤울레이의 십자가 언덕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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