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오늘은
리투아니아 관광의
하이라이트인
트라카이 성 (Trakai Island Castle)을
돌아보는 날.

유럽 여행이란게
90%는 교회 아니면 성을 구경하는 것인데
리투아니아 여행도 예외가 아니다.

트라카이 성은
빌뉴스에서 30km 정도 서쪽에 위치한 트라카이시의
'갈베(Galve)' 호수에 떠있는  작은 섬에 지어진 아름다운 고성이다.
유럽의 성들이
호반이나 강변에 지어진 경우는 많지만
이처럼 호수 한 가운데의 섬에 지어진 성은
북 유럽에서 여기가 유일하다고 한다.

 

(트라카이 성, Trakai Island Castle)
 
(트라카이 지역엔 수백개의 크고 작은 호수가 있으며 호수에는 또 수많은 섬이 흩어져 있다고 한다)
 
 

 

(갈베호수 요트 투어)
성도 성이지만
호수 자체가 너무 아름답다.
성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요트를 타고 성 주변을 한바퀴 돌면서
풍광을 감상해 본다.

 

 

요트 하나에
여섯명씩 나눠타고 출발.

(비록 조그만 요트의 주인지만 턱수염과 선글라스로 거의 마도로스급 포스를 취하고 있다)
 
 
 
 
 

 

(리투아니아 왕가의 역사)
트라카이 성의 역사를 이야기 하자면
'게디미나스' 대공 이야기부터 좀더 살펴 봐야 할 것 같다.

1316년
리투아니아 대공(Grand Duke)이 된
'게디미나스'는
영토를 확장하면서 강국의 기틀을 쌓고
새로운 왕조시대를 열었으며
3명의 부인에게서 7명의 왕자를 얻는다.

그중
4째 '알지르다스'(Algirdas)와
5째 '케스투티스'(Kestutis)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누빈 용맹한 장수로서
유력한 차기 후계자였다.

그런데
'게디미나스'가 1341년 죽으면서
정작 왕위를 물려준 것은
6째 아들인 '야우누티스'였다.
'야우누티스'는
'게디미나스'가 죽기 이전까지
아무런 행적과 기록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디미나스'가
유능한 두 아들을 제치고
'야우누티스'를 후계자로 삼았는지는
리투아니아 역사가들도
오늘날까지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다.
다만
'야우누티스'가
두번째 부인이 낳은 첫째 아들로서
왕의 총애가 각별했던게 아닌가 추정할 뿐이다.

아무튼
우리나라 조선초의
'방원'과 '방석'이 대립한
왕자의 난과 비슷한 상황이 된 것인데
결국 '알지르다스'는
1345년
'케스투티스'의 협조를 얻어
'야우누티스'를 무능하다는 이유로 쫓아내고
스스로 왕위를 차지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왕권에 대한 지분이 조금 더 많은 것으로 보이는 '알지르다스'가 
동생 '케스투티스'와는 권력투쟁을 벌이지 않고
사이좋게 대권을 나눠가졌다는 점이다.

두사람은 공동 대공이 되어
'알지르다스'는 빌뉴스에 머물면서 그 동쪽을
'케스투티스'는 트라카이를 거점으로 그 서남쪽을
각각 정벌하고 관할하는 묘한 콜라보를 이룸으로써
리투아니아 영토는
'게디미나스' 때보다 더 확장되어
동으로는 모스크바의 수십킬로미터 전방까지,
서남쪽으론 폴란드 일부와
지금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흑해까지 차지하게 된다.
지금 영토의 7~8배가 넘는 대국이 된 것이다.

 

(14~5세기 경의 리투아니아 지도, 출처:구글)
 

 

이처럼
역사에 보기 드믄
기묘한 쌍두체제는
'알지르다스'가 1377년 죽음으로써
대 혼란기를 맞게 된다.

'알지르다스'의 장자로서
리투아니아 대공의 자리를 이어받은
'가일라'(Jogaila)와
아직 살아있는 삼촌이자 공동 대공인 '케스투티스',
또 그의 아들인 4촌 동생 '비타우타스'(Vytautas) 사이에
대대적인 내전이 발생한 것이다.

(리투아니아의 기독교)
여기서 잠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짚어 보면
로마 교황청이 수세기에 걸쳐
십자군 전쟁을 벌이고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유럽 나라들은 대부분  카톨릭 국가가 되었고
러시아 등 일부도 동방정교회의 형태로 기독교화 되었는데
리투아니아는 유럽국가 중 거의 유일하게
1300년대 중반까지도
기독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토속 신앙을 믿는 이교도 국가로 남아 있었으며
그 때문에 십자군의 공격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일라'와 삼촌 '케스투티스'의 알력은
바로 종교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도 할 수 있다.
30세의 젊은 피
'가일라'는
기독교를 받아들여서
십자군과의 충돌도 없애고 서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국가를 현대화 하자는 쪽인데 반해
나이 80세의 노익장
'케스투티스'는
조상의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절대 용인할 수 없다는 측이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일라'는 1380년
십자군 측과 비밀협정을 체결한다.
"양측은 상호 침범하지 않되
'케스투티스'를 공격하는데 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는
좀 비열한 내용이었다.

이를 알게 된
삼촌 '케스투티스' 대공은 격분하여
아들 '비타우타스'와 함께
빌뉴스로 처들어가서
'가일라'를 대공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투옥시킨다.

하지만
'케스투티스'는
충성맹세를 하고 싹싹 비는
장조카 '가일라'를 어쩌지 못하고 풀어주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가일라'는
와신상담 2년만에 다시 세력을 모은 후
빌뉴스를 향해 군사를 일으킨다.

1382년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질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가일라'는
싸우지 말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케스투티스'와 '비타우타스'는
이를 수락하고 협상테이블에 나섰다가
'가일라'의 배신으로 체포되었고
지금의 벨라루스에 있는 크레베(Kreve) 성에 유폐된다.
참으로 어이없는 '가일라'의 얍삽함이다.

얼마후
'케스투티스'는 목을 맨 시신으로 발견되는데
모두 '가일라'가 손쓴게 아니겠느냐고 수근댔다고 한다.
삼촌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주지만
아직도 내란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크레베 성을 탈출한
'비타우타스'가 십자군과 손을 잡고
다시 재반격의 전열을 가다듬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가일라'는
기독교를 공식 인정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기로 십자군과 약속해 놓고는
딴청을 피우면서 차일피일하던 시기였는데
'비타우타스'는
먼저 과감하게 카톨릭 세례까지 받고
십자군의 힘을 빌어 '가일라' 진영을
자주 기습하곤 했다.

그동안
'가일라'가
기독교를 기본적으로 선호하면서도
이리저리 재면서 좌고우면한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러시아 귀족이었던
어머니 '율리아나'(Uliana)는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로서
아들이 당시 모스크바 대공의 딸인 '소피아'와 결혼해서
러시아 정교회를 받아 들여 줄 것을 
줄곧 압박해 왔던 것이다.

하지만
'가일라'로서는
십자군의 끊임없는 공격을 전쟁으로 막기보다는
십자군이 요구하는 카톨릭을 받아들이는게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효도냐 국익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야가일라 리투아니아 대공 겸 폴란드 국왕)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국)
바로 그때
'가일라'에게 뜻밖의 기회가 온다.
1382년
폴란드 국왕이
10살짜리 딸 '드비가(Jadwiga)'를 후계자로 남기고 사망하자
폴란드 왕실은
리투아니아가 카톨릭을 받아 들인다면
'가일라'와 '드비가'를 결혼시켜
폴란드 왕위를 잇게 하겠다는 제안을 해 온 것이다.

왕의 자리를 이방인에게 내주는
이런 처사가 우리로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지만
러시아나 유럽국가들의 사례를 보면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다.

'가일라'는
4년을 고민한 끝에
1386년
폴란드에서 세례를 받고
'드비가'와 결혼식과 대관식을 가진 후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2세(Wladyslaw II)로 등극했으며
리투아니아는 공식적으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리투아니아 땅은
자신의 친동생에게 통치하도록 위임했으나
동생이 제대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1392년
그동안 적대적이었지만
어렸을 적 친구처럼 함께 자랐고 전쟁터를 누볐던
능력있는 4촌 동생 '비타우타스'에게
리투아니아 전체의 통치를 맡긴다.

'비타우타스'가
1430년까지 리투아니아를 다스리다가 죽은 후엔
리투아니아에 별도의 왕을 세우지 않고
'가일라'의 후손들인
폴란드 왕들이 겸임 통치를 하게 된다.
리투아니아가 폴란드를 먹은건지
폴란드가 리투아니아를 먹은건지
구분이 모호하다.

그러다가
1569년에는
아예 양국이 협정을 맺어 연합국으로 출범하며
1600년대에는 인구가 1천만명을 넘는
유럽 최대 강국으로 부상한다.
하지만 그후
'가일라'의 후손은 끊겼고
리투아니아와 전혀 상관없는 폴란드 왕들이 지배하다가
1700년대말 연합체제는 붕괴된다.

(트라카이 성)
트라카이 성은
형제들의 난이 한창이던
바로 그 무렵 지어진 성이다.
'케스투티스'가 1300년대말 짓기 시작해서
'비타우타스'가 1409년 완공했다고 한다.

전략적으로
방어가 용이한 지형에
세워진 이 성에서
형제들이 내전 중 서로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고
십자군과 전쟁을 치르기도 한
역사의 현장이다.

 


트라카이성 안으로 들어가 본다.


 
 
 
(성 초입의 연병장)
(고문 체험도구들이 비치되어 있다. 이런거 꼭 해보는 사람들이 있어서 재미있다)
 
 

왕실의 주거 공간인
내성으로 들어가 보자.

 
 
 
 
 
 

 

리투아니아의 영웅이라면
알지르다스나 야가일라를 꼽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트라카이 성을 지은
케스투티스와 비타우타스야말로
현대 리투아니아 국민들에게
가장 멋진 문화유산을
남겨준 영웅이 아닐까.

***

오늘 점심은
호숫가의 예쁜 레스토랑에서
트라카이 성을 바라보며...

 
(보리밥에 볶은 쇠고기를 얹었는데 전통음식은 아니고 퓨전인 것 같다. 우리 입맛엔 잘 맞는다)
 

다음 편에선
샤울레이의 십자가 언덕을 보고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로 갑니다.

 

 

 

 

 

반응형
댓글